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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만 듣기엔 남은 생이 아까워…

중앙선데이 2013.04.28 02:32 320호 27면 지면보기
독일 뮌헨 출신의 율리아 피셔(30). 2005년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앨범으로 데뷔했다. [Julia Wesely]
벌써 금요일이구나. 어쩌다 보니 월요일부터 한 주일 내내 문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다. 오렌지와 계란을 사러 동네 수퍼에 다녀온 것도 외출로 친다면 딱 한 번인가. 밥솥 가득 밥을 지어놓고 조금씩 퍼먹다 보면 밤이 오고 또 금방 똑같은 다음 밤이 찾아온다. 방에 틀어박혀 언제나 밤에 깨어 있는 사나이. 감지 않은 머리가 봉두난발한 폐인풍의, 그러나 아직은 멀쩡한 사나이. 그 사이 무얼 했던가. 기타노 다케시의 미처 못 본 모든 영화를 챙겨 보았고(그의 최고 작품으로 단연 ‘아킬레스와 거북이’를 꼽겠다!), 카트린 마십의 ‘음악의 모험’을 재미없게 읽었고,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을 즐겁게 읽었고… 하지만 지금도 시디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의 샤콘 대목을 말해야 한다. 그토록 유명하고 익숙한 곡이 갑자기 새롭고 특별하게 다가오다니.

[詩人의 음악 읽기] 바흐 ‘샤콘’

EMI
며칠 전 ‘파뤼’라고 부르는 모임이 있었다(그날만은 머리를 감았다). 최근에 전시회를 마친 화가 오숙진의 팸플릿 글을 써준 인연으로 몇몇이 찾아온 건데 숨소리도 조심조심하는 화가만 빼고 일행은 아주 씩씩한 여인들이다. 통상 그렇듯이 여러 종류의 와인이 오가고 그들의 이탈리아 유학 추억담이 계속되고 있는데 항상 판돌이 노릇을 하는 내 손에 우연히 그 곡이 걸렸다. 바흐의 샤콘. 요한나 마르치(작은 사진)의 연주였다. 가장 씩씩해 보이는 여성 입에서 탄식 혹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슬프다!”

좌중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모드에 돌입했다. 마르치의 오래된 샤콘 연주는 아주 느릿느릿 참석자 전원이 피워대는 담배연기 속을 파고들었다. 심금(心琴)이란 마음의 현악기를 뜻한다. 징징 울어대거나 후벼파거나 튕기거나. 흉금(胸琴) 또한 갈비뼈 안쪽의 현악기를 뜻한다. 다 꺼내서 털어놓고만 싶은 각자의 생애와 사연들. 심금이든 흉금이든 건드리면 아프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다들 아파 보였다. 나도 덩달아 아팠다. 머릿속에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식의 ‘파뤼’가 가능할까 하는, 다시 말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건가 하는 상념이 가득했다. 바흐 음악에 몽롱해져 있는 저 삼십대 후반들은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생에는 끝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나도 저 나이 때는 그랬다. 하지만 앞으로 한 스무 번쯤의 봄밤을 누리고 나면 내 지상의 삶은 종언을 고한다. 혹시 늘어나는 수명에 비추어 더 많은 봄밤을 맞이하더라도 흐릿한 정신과 흐느적거리는 육신의 상태를 삶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날 밤의 바흐 앞에서 장차 남아 있는 봄날을 스무 번쯤으로 정하자 나는 돌연 씩씩해졌다. 샤콘에 대한 불타는 탐구심이 발동한 것이다.

비애감으로 충만한 요한나 마르치의 샤콘 연주는 특별 메뉴다. 아마도 음반 애호가 대부분은 그뤼미오, 하이페츠, 헨릭 셰링, 나단 밀스타인 등의 연주만 마르고 닳도록 반복해 들어왔을 것이다. 괴테가 말하는 ‘선택적 친밀감’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크게 빛나는 인물은 율리아 피셔나 힐러리 한 같은 어여쁜 소녀들이다. 그들은 연주도 도발적이다. 이들의 선배로 갓 마흔 줄에 접어든 이자벨 파우스트, 테디 파파브라미의 연주는 또 얼마나 단아하면서 서정적이던지. 또 그 윗 연배로 안네 소피무터나 빅토리아 뮬로바도 혼신의 힘을 다해 샤콘을 녹음했고 아, 이십대 후반 나이에 정경화도 음반을 냈었다. 그 흔한 된장찌개조차 식당마다 맛이 다 다르다. 몇몇 익숙한 거장의 연주만 반복 청취하기에는 남아 있는 생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식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거대한 전체 집단의 일부로 자아가 함몰되어 있을 때 죽음은 그리 놀랍거나 끔찍한 사건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을 테지만 가령 봄밤의 기타노 다케시, 바흐의 샤콘은 계속될 것이고 불쑥불쑥 골목 어귀에 출몰하는 길고양이들의 생존 또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내가 남겨 놓고 갈 음반과 오디오는 또 누군가의 공간에서 심금의 현을 계속해서 퉁길 것이고. 이처럼 계속되는 것들 속에서 언젠가 찾아올 나의 부재가 그렇게 놀랍거나 슬픈 축에 속할 일이겠는가. 의연함 또는 무심함을 남아 있는 생의 지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나저나 평론가들이 하도 치켜세워서인지 들어본 음반마다 매혹을 안겨주는 율리아 피셔가 올 10월 말에 첫 내한공연을 한다. 미하일 잔데를링의 지휘로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나도 필시 공연장을 찾아갈 것 같다. 아마 연주자들은 알고 있겠지. 골방에 처박히기 좋아하는 세상의 음악쟁이들이 일삼아 공연장을 찾아가는 의미를. 그것은 나는 아직 살아있다!, 바로 그 같은 존재증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시인 최승자는 이렇게 썼다.

‘내가 살아있는 것은 한낱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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