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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다 예술일 순 있지만, 다 좋은 예술은 아니다

중앙선데이 2013.04.28 02:46 320호 28면 지면보기
쿠바 출신 미국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연인들)’는 대량생산된 똑같은 벽시계 두 개를 나란히 걸어놓은 썰렁한 작품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계를 더 잘 걸어놓겠다고 하나를 떼어 다른 곳에 걸지도 모르겠다. 10여 년 전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재떨이를 쌓아놓은 설치작품을 환경미화원이 ‘청소해’버린 사건처럼.

개념미술<하>

곤잘레스-토레스의 두 시계가 붙어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똑같은 모델이지만 그조차도 부품의 미세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리키는 시간이 점차 조금씩 달라진다. 마침내 어느 날에는 한 시계가 먼저 멎는다. 부제 ‘완벽한 연인들’처럼 아무리 서로 공유하는 점이 많고 깊이 사랑해서 서로에게 맞추며 살아가도 두 사람의 삶의 시간은 똑같이 흐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물리적 시간도, 정신적 시간도.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연인들)’. 2012년 플라토에 전시되었던 모습.
이 작품은 작가의 개념(concept)을 글로 쓴 것과는 또 다르게 시각적인 것을 통해 긴 여운을 남기며 전달한다. 이런 작품을 미술(美術)의 전통적 요소인 강렬한 시각적 충격(美)과 테크닉(術)이 없다는 이유로 미술에서 제외해 버리면 그만큼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사고의 풍요로움을 놓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미(美)와 술(術)이 없어도 미술이라 할 수 있다면 대체 예술이 아닌 것과의 경계는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에 사인을 해서 미술관에 갖다 놓은 것처럼 무엇이든 형식을 갖춰 제도적 공간에 놓으면 예술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제도권 밖 길거리의 설치미술이나 퍼포먼스는 예술에서 제외할 것인가? 또는 예술가가 하면 예술인 것인가? 그렇다면 예술가는 또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미대 나온 사람만 미술가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변증법적인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다소 극단적인 답에 이르게 된다. ‘무엇이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그것이 예술이라고 선언하면 예술이 된다’는 답 말이다. 백남준의 플럭서스 동지였던 요제프 보이스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예술가”인 것이며 모든 삶의 형태가 예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새천년건강체조를 하며 그게 행위예술이라고 선언한다면 예술이 되는 것인가?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렇다. 즉 그냥 건강체조를 하면 체조인 것이지만 그것을 행위예술이라고 ‘선언’하면 예술이 된다. 그러나 잠깐! 그게 ‘좋은 예술’이냐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예술’로 간주된다고 해서 무조건 고차원적인 것으로 대접을 받고 비판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관람자가 열린 눈으로 보고, 열린 마음으로 설명을 들어도 ‘아하, 그렇구나’ 하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속된 말로 ‘쌩쇼’에 불과한 ‘시시한 예술’이다. 그런 예술에 대해서 관람자는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 예술이 시공간적으로 유일무이하게 현존하기 때문에 아우라(aura)가 있고, 사진과 영화는 기술적으로 똑같이 대량 복제되기 때문에 아우라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베냐민은 아우라 없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을 비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우라가 일종의 종교적 숭배-관람자의 수동적 수용-를 가져온다고 했다. 반면에 아우라가 파괴된 사진과 영화에 대해서는 대중이 훨씬 능동적으로 비평적인 태도를 지닌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과연 사람들은 사진과 영화에 대해서는-전위적인 것이라도-한마디씩 평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 덕분에 사진과 영화는 생명력을 지니고 오늘날 예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개념적 미술도 그렇게 될 수는 없을까? 베냐민은 개념미술의 시초인 다다이즘이 (뒤샹의 변기처럼) 대량 복제된 기성품을 사용해 스스로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관람자에게 민주적으로 다가갔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개념미술은 오히려 그 난해함의 새로운 아우라(?)에 눌려 관람자가 침묵하는 양상이다. 이제 대중의 능동적 태도와 비판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개념미술이 미술관에 낡은 성상처럼 덩그러니 놓여있지 않고 대중과 밀착되어 생명력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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