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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역사 분쟁으로 '오구라 컬렉션' 환수 여론 높아져

온라인 중앙일보 2013.04.28 00:02
대한제국의 황사손(皇嗣孫ㆍ황실의 적통을 잇는 자손) 이원(50) 대한황실문화원 총재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너졌다. 한참 엎드린 채 대성통곡했다. 지난 2월 5일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대회의실에서다. 박물관 측이 그에게 대한제국 황실의 투구ㆍ갑옷ㆍ익선관(왕이 정무를 볼 때 쓰는 관)을 특별 열람토록 한 자리였다. 이 총재는 고종의 증손자다. 2005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1931~2005)의 양자로 선택됐다. 이 유물들은 그동안 외부에 한 번도 공개가 안 됐던 것들이다. 눈물을 닦고 유물을 꼼꼼히 살펴본 그는 “눈으로 봐도 보존 상태가 안 좋았다. 부속 장식물이 떨어져 나가거나 옷감이 해어진 곳이 꽤 됐다”고 말했다. “망국의 한이 느껴져 너무나 서글펐다”고도 했다. 이 총재는 또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황실의 유물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느냐’고 물어봐도 묵묵부답이었다”며 “황실의 후손 자격으로 이 유물들을 되찾도록 애쓰겠다”고 말했다.


재점화한 해외 반출 문화재 환수





이원 총재가 살펴본 유물은 ‘오구라 컬렉션’의 일부였다. 투구의 이마 가리개에 임금의 상징인 용이 그려진 백옥이 달렸다. 갑옷엔 발톱 5개를 가진 조룡(爪龍)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서로 바라보는 무늬가 그려져 있다.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박물관의 협조를 받아 1999~2002년 4차에 걸쳐 오구라 컬렉션 소장품을 촬영해 2005년 도록을 내놨다. 이때 투구ㆍ갑옷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도록은 투구를 “왕실의 최고위층, 다시 말해 왕이나 왕세자가 착용한 물건”이라고 추정했다. 갑옷의 경우도 “최고의 고위층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적었다. 박물관도 지난해 대한제국 황실의 물품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다만 입수 경위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황사손과 한국의 문화재 환수 시민단체인 ‘문화재 제자리 찾기’(대표 혜문 스님)가 여러 차례 특별 열람을 요청했는데 박물관은 내부 사정을 들어 거부했다. 정보공개 청구소송까지 준비하자 박물관이 마지못해 특별 열람을 허용한 것이었다. 박물관은 이 투구와 갑옷을 올 10~12월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전해 왔다. 투구ㆍ갑옷 외에도 동다리(갑옷 안에 입는 긴 두루마리), 직령(두루마기 종류) 등 대한제국 황실 유물 4점이 컬렉션에 포함됐다. 모두 미공개 물품이다.



오구라 컬렉션 환수 문제가 다시 점화됐다. 한ㆍ일 양국이 역사인식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면에서다. 대한제국 황실 소유의 투구ㆍ갑옷이 해묵은 오구라 컬렉션 이슈를 다시 끄집어 냈다.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뒤 황실의 궁내부를 이왕직(李王職)으로 격하시켰다. 이왕직이 관리하고 있는 황실의 유물ㆍ재산을 일제의 허가 없이 민간이나 해외로 반출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투구ㆍ갑옷과 같이 상징성이 높은 유물이 일본에 넘어가는 것은 범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결정적 증거는 오구라 컬렉션을 수집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제공했다. 오구라는 64년 사망 직전 아들 야스유키(安之)에게 자신이 컬렉션의 유물 1144점을 어디서 어떻게 수집했는지를 정리한 자필 목록을 남겼다. 이 목록은 300여 부가 등사돼 지인들에게도 나눠졌다. 이 중 한 부가 익명의 일본인을 통해 일본 고려박물관 이소령(76) 이사에게 전해졌다. 목록에 따르면 투구ㆍ갑옷은 ‘이왕가(李王家ㆍ대한제국 황실을 낮춰 부르는 말) 전래’라고 돼 있다. 익선관ㆍ동다리ㆍ직령은 ‘이태왕(李太王) 소용품(所用品)’이라고 쓰였다. 이태왕은 일제가 고종을 지칭하는 말이다. 갑옷 안에 동다리를 받쳐 입는 용례를 보건대 갑옷 역시 고종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오구라 컬렉션은 중국ㆍ일본 문화재도 있지만 대부분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한국 문화재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가야의 ‘금동관모’,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비로자나불입상’ ‘은평탈육갑합’ 등 39점은 일본에서 국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문제는 600~700점에 이르는 고고학 발굴 출토품이 도굴됐거나 장물로 의심된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전역에서 ‘조선 고적 조사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를 발굴했다. 발굴품 일체는 총독부가 소장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오구라는 금관총 유물 8점을 소유했다. 또 발굴 직후 금관총 출토품이 비싼 가격으로 일본에서 거래됐다. 누군가 문화재를 빼돌렸다는 증거다.



실제로 당시 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 책임자였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33년 도굴교사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금관총 문화재를 판 장본인으로 지목된다. 이 중 일부가 오구라까지 흘러들어간 셈이다. 오구라가 20년대 창녕 고분을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려 도굴했다는 구전이 있다고 혜문 스님은 밝혔다.



'문화재 약탈자' vs '문화재 애호가'

오구라는 한국에서 대구전기회사ㆍ대흥전기ㆍ남선합동전기를 잇따라 차려 큰돈을 벌었다. 한국의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모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오구라는 자필 목록에 스스로 "나는 사학ㆍ고고학에 관해서 일개 문외한"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선 그를 문화재 약탈자로 부른다.



반면에 일본에선 문화재 애호가로 평가한다. 높은 안목으로 불상ㆍ회화ㆍ도자기 등을 시대별로 모아뒀고, 일부는 도굴품이지만 상당수 합법적으로 사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세대 박물관 관장인 김도형(사학과) 교수는 “문화 제국주의의 관점”이라며 “유네스코에서도 전쟁이나 식민지로 빼앗기거나 불법 반출ㆍ도난 문화재는 반환하는 게 원칙이라고 규정했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우리 문화재는 우리 땅에서 우리 손으로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오구라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컬렉션의 상당수를 내다팔았다.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소장품도 목록(1144점)보다 적은 1030점이다.



문화재청과 지난해 해외 문화재 환수 목적으로 세워진 국외 소재 문화재 재단은 “환수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찮다. 유네스코 협약은 구속력이 없고, 70년 이후 문화재에만 해당된다. 지금까지 주요 문화재의 반환은 소유자의 자발적 의사나 국가의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뤄졌다.



국제 여론도 우호적이진 않다. 2002년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 전 세계 40여 개 박물관 관장들은 “문화재는 보편적 인류 문명으로 반드시 원산지에서 소장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국외 소재 문화재 재단 관계자는 “오구라 컬렉션 환수는 국제법적 측면보다는 한ㆍ일 양국의 국제 정치적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구라 컬렉션은 일본의 침략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며 “식민지배에 대한 명백한 사죄를 일본에 요구하는 차원에서 컬렉션을 환수할 당위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이슬기 인턴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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