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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수막염으로 사지 절단…"축구선수 꿈은 포기했지만, 시로 환우들 돕겠어요"

중앙일보 2013.04.23 18:23
이동한
늙은 기관사의 집은 역에서 멀지 않다

오늘도 기차소리가 파란 페인트칠 한 대문을 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지붕을 뚫고 지나가지만

그는 신발을 벗듯 기차에서 내렸다

....



그는 철길위의 구름이었다, 집 밖에서 잠들던 날이 더 많았다

누구하나 내리던 이가 없던 적막한 신발에서

그는 빈 바구니를 들고 내렸던 것이다

그에게 잠깐 멈춤의 건널목은 없었다, 속도가

그의 집이었고 길이었고 평생의 월급이었다

.....



늙은 기관사는 천천히, 처음으로

복사꽃 붉은 꽃잎 속을 들여다본다

침목처럼 단단하던 무릎이 시큰거리는 봄이다



-‘늙은 기관사의 집’ 중, 이동한



월드컵 4강 진출 신화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2002년 겨울. 다음 월드컵의 주역을 꿈꾸며 고된 합숙생활을 견디고 있던 열일곱살의 축구선수 이동한(27)씨는 갑작스레 오한을 느꼈다. 늘상 있는 감기려니 하고 감기약을 챙겨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새벽녘, 40도가 넘는 고열과 호흡 곤란이 찾아왔다. 곧 정신을 잃었다.



이씨는 얼마 후 눈을 뜨고 난 순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었다. 곧 깨어날 악몽이라고 되뇌었지만 너무나 분명한 통증이 현실임을 일깨웠다.



이는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압도한다. 이씨는 10여년 전 수막구균성 뇌수막염에 감염, 살기 위해 괴사(壞死)하는 사지(四肢)를 잘라내야 헀다.



뇌수막염은 뇌와 척수를 둘러싼 막이 바이러스나 세균에 감염돼 발생하는 질환이다. 바이러스성은 감기처럼 앓고 지나간다. 그러나 세균성의 경우엔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기거나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위험한 세균성 뇌수막염의 경우, 유난히 발병률이 높은 두 번의 시기가 있다. 첫째가 생후 18개월부터 6세 사이의 영유아기다. 5세 이하의 발병률은 전체 세균성 뇌수막염 발병률의 절반을 차지한다. 폐렴구균과 B형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Hib)에 의한 뇌수막염은 이 시기에 많이 발생한다.



두 번째 시기는 15~24세 사이에 온다. 이 시기 가장 많이 발생하는 뇌수막염이 바로 이씨가 앓았던 수막구균성 뇌수막염이다. 이런 뇌수막염은 합숙생활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위험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세계 인구의 10명 중 1명은 목이나 콧구멍 뒤에 수막구균을 가지고 있으며, 보균자의 타액을 통해 호흡기로 감염된다. 특히 활동력이 왕성한 19세 전후한 사람의 수막구균 보균율은 24%에 이른다. 때문에 군 신입장병 훈련소, 대학 기숙사 등에서 수막구균성 뇌수막염 발병률이 눈에 띄게 높다. 실제로 2011년에만 충남 논산훈련소에서 4명이 이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치료 기술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수막구균성 뇌수막염의 사망률은 16%에 달한다. 일단 발병하면 손 쓸 틈 없이 빠르게 질환이 진행되는 탓에 24~48시간 이내 사망에 이른다. 게다가 살더라도 5명 중 한 명은 사지절단ㆍ뇌손상ㆍ청각소실 등의 치명적인 영구장애에 시달린다. 그런데도 초기 증상이 감기와 비슷해 처음 발병 당시엔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무심코 넘기기 십상이다. 또 주로 청소년이나 20대 전후의 건강에 무관심한 연령층이 고위험군인 탓에 그 치명성에 비해서 질환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중ㆍ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에게 수막구균 백신에 대한 권고안이나 법안을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는 곳이 많다. 미국ㆍ영국ㆍ호주 등은 수막구균 백신이 필수예방접종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수막구균 뇌수막염에 대한 예방 백신이 있는데도 이해가 부족해 접종률은 극히 미미하다.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가정의학과 유병욱 교수는 “유학이나 기숙사 생활, 군입대 등과 같이 집단 생활을 앞뒀다면 예방 접종을 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전세계적으로 매년 179만 명의 사람들이 뇌수막염으로 고통 받고, 이중 세균성 뇌수막염으로 17만명이 죽어가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은 예방 접종만 했어도 구할 수 있는 생명이었다.



이씨는 “축구선수를 꿈꾸던 내가 팔ㆍ다리가 잘려 나갔으니 얼마나 그냥 목숨을 끊고 싶었겠냐”며 “그렇지만 지금부터라도 나같은 사람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도록 수막구균성 뇌수막염의 위험성과 예방법을 알리는 게 가치있다 싶어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축구선수 대신 지금은 시를 통해 내 마음을 전하고 나처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데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동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늙은 기관사의 집’은 2011년 가람 이병기 청년시 문학상에 당선됐다.



24일은 ‘제5회 세계 뇌수막염의 날’이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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