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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돈이 숨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2013.04.23 00:42 경제 4면 지면보기
12억원의 금융자산이 있던 정모(48)씨는 최근 자산 포트폴리오를 확 바꿨다. 6억원가량의 은행 예금 가운데 2억원을 지난해 말 즉시연금에 넣어뒀다. 1억원가량은 은행의 골드바를 사는 데 썼다. 2억원은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증권계좌로 갈아탔다. 정씨가 이렇게 예금을 크게 줄이고 있는 것은 올해부터 금융소득종합과세가 강화(대상자, 이자와 배당소득 4000만원 이상→2000만원 이상)된 데다 상당수 현금거래도 과세당국에 제공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정씨는 “요즘 금리가 2%대로 주저앉은 은행에 돈을 넣어둬 소득이 노출되는 것보다 금 같은 현물을 보유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양지에 있던 돈까지 음지로 … 지하경제 양성화의 역설
"거래정보 노출되느니 빼겠다"
두 달 새 정기예금 5조원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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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 숨기 시작했다.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음지에 있던 돈을 양지로 끌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되레 돈이 움츠러들고 있다. 양지에 있던 돈이 음지로 숨어들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은행의 정기예금은 두 달 연속 2조5000억원씩 줄어들고, 금고회사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예금에서 빠져나온 돈이 현금이나 금 형태로 장롱이 아닌 금고로 둥지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돈은 증시 대기 자금으로 흘러가고 있다. 주식 시세차익은 세금을 내지 않아서다.



 정부는 ‘금융정보분석원(FIU)법’을 바꿀 예정이다. 그동안 FIU가 보유한 현금거래 정보 가운데 ‘조세범죄 혐의’가 있는 것만 국세청에 제공했으나 앞으로는 국세청이 ‘탈세가 의심된다’고 하면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개정된다. 여기에 이자와 배당소득에 대해 최고 38% 세율을 매기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가 연 4000만원에서 올해는 연 2000만원으로 강화됐다. 은행 이자가 3% 내외일 경우 지난해에 예금이 12억원을 넘어야 대상이 됐지만 올해는 6억원 내외만 돼도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뭉칫돈이 은행에서 쑥쑥 빠져나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이 2, 3월 두 달 연속 감소했다. 정기예금 잔액은 3월 말 현재 553조3000억원으로 전달보다 2조5000억원가량 감소했다. 정기예금은 2월에도 2조5000억원가량 줄어들었다. 특히 4대 시중은행(국민·우리·신한·하나)의 예금액 5억원 이상인 정기예금 잔액은 지난해 말 19조2000억원에서 3월에는 18조9000억원으로 크게 줄고 있다. 이희수 우리은행 투체어스 강남센터 팀장은 “자산가 중엔 상당수가 직장 없이 돈을 굴리는 사람도 많다”며 “이들은 자금 거래와 소득이 노출될까 우려해 다른 곳으로 돈을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예금에서 빠져나간 돈은 금 시장, 증시 등으로 흘러들고 있다. 최근 세계 금값이 급락하고 있는데도 시중의 금 사재기 바람은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 신세계백화점 금괴 매출은 지난해 4월보다 3000% 넘게 증가했다. 신세계 관계자는 “금괴는 원래 백화점의 구색 상품이었으나 최근 매출이 크게 뛰면서 주력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며 “각종 세제 개편과 사회적 불안감으로 금괴를 사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지난해 11월 18일간 전 점에서 골든듀의 금괴를 팔았다. 하지만 이달 4일부터 17일까지 15일간 롯데 본점에서 판매된 금괴 매출이 지난해 매출보다 5~6배가량 늘었다. 골든듀 관계자는 “10g, 50g짜리 금을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의 골드바를 사려는 고객은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 이 은행은 골드바 판매 한도를 지난해보다 두 배가량 늘렸지만 최근 사려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수요가 공급을 과도하게 초과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4일 골드바 판매를 시작한 국민은행도 판매 첫째 주에 13억원어치 팔렸으나 지난주에는 55억원으로 판매액이 껑충 뛰었다.



 증시의 대기자금으로도 돈이 움직이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투자자예탁금은 지난해 말 17조원에서 18일 현재 18조500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투자자예탁금은 주식 투자를 위한 대기성 자금이다. 공성률 국민은행 목동PB센터 PB팀장은 “많은 고객이 주식으로 돌아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주식은 배당금은 과세되지만 매매 차익에 대해선 비과세가 되다 보니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 소득이 적게 잡힌다”고 말했다.



 금고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요즘 금고회사는 경기침체 속에서도 호황을 맞고 있다. 1973년 설립된 선일금고제작은 올 들어 매출이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3월 매출은 전년 동기의 두 배나 기록했다. 이 회사의 권영석 마케팅 과장은 “사무용 수요는 그대로인데 가정용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사무용 금고였지만 요즘에는 70% 이상이 가정용 금고라는 설명이다. 이 회사의 가정용 금고는 가격대가 132만~484만원대로 다양하며 가정용 가격이 기업용의 2.5배가량 된다. 권 과장은 “많은 고객이 현금과 귀금속뿐만 아니라 주요 문서도 보관하는 용도로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경우 금고매장이 지난해 7월 입점했을 때보다 매출이 두 배가량 늘었다.



김창규 기자



금융정보분석원(FIU) 금융회사를 통한 자금 세탁을 예방하고 외화의 불법 유·출입에 대처하는 자금세탁방지기구. 2001년 11월 ‘특정 금융거래 정보의 보고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당시 재정경제부 소속기관으로 발족했다. 2008년 2월 정부조직법 개편 등으로 금융위원회의 소속기관으로 변경됐다.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가 중앙 국가기관으로 금융정보분석기구를 두고 있다. FIU는 법무부·금융위원회·국세청·관세청·경찰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 등 관계기관의 전문 인력으로 구성돼 있으며 자금 세탁 관련 혐의 거래를 수집·분석해 관련 기관에 제공하고 있다. 고액현금거래보고(CTR·1일 2000만원 이상 현금거래)와 의심거래보고(STR·1000만원 이상 현금 거래 가운데 자금 세탁이 의심되는 경우) 등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금융회사가 보고하는 STR 건수는 2006년 2만4000여 건에서 2011년 32만9463건으로 크게 늘었다. CTR도 같은 기간 501만 건에서 1131만 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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