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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철의 노동자', 제발 돌아오라

중앙일보 2013.04.23 00:28 종합 35면 지면보기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1990년대 초 안치환의 ‘철의 노동자’가 불리면 시민들은 절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민주화 풍랑 속에서 노조는 국민의 희망이었다. 2013년, 그 노래에 화답하는 시민들은 없다. 그들만이 부르는 진군가에 시민도 한국 경제도 짓밟혔다. 철의 노동자가 진군한 곳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그들의 애절한 동지였던 비정규직에게도 빗장을 잠그고 투쟁가를 열창하는 정규직 노조는 양극화의 책임을 전가하는 정의의 깃발을 내건 채 한국의 몰락을 재촉한다. ‘철의 노동자’는 이제 ‘철옹성 노조’가 되었다.



 기아차 광주공장 37세의 김씨가 분신으로 항거했고, 현대차 29세 공씨가 자살로 노동자의 생을 마감했다. 철옹성 노조 때문이다. 사내 하청분회 조직부장 김씨, 촉탁계약직 공씨의 염원은 오직 하나 ‘정규직’이었다. 그런데 김씨는 ‘정규직 고용 세습’에 막혀 절망했고, 공씨는 정규직 전환 대상 명단에 끼지 못하고 해고되자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철옹성 노조엔 해고라는 단어는 없다. 그들의 동지였던 비정규직의 분신과 자살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60세 퇴직, 고용 대물림, 그리고 평균 연봉 1억원 돌파만이 그들이 단결하는 지상의 목표다.



 노조를 헐뜯는 건 아닌가, 그게 사실인가를 반문하는 사람은 현장에 내려가 탐문해보라. 금속노조 기아차 지부는 정규직 신규 채용 때 장기근속자와 정년퇴직자 자녀에게 1차 면접 10%, 2차 면접 5% 가산점을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관철됐다. 면접 대상자 25%는 장기근속자 몫이다. 남미 경제를 망친 주범인 ‘고용 세습’이 평등주의 한국에서, 그것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던 민주화의 첨병이 쟁취한 전과였다. 거기에 나이 제한도 부가됐다. ‘35세 미만’이라는 이면 합의에 걸린 비정규직 노동자는 기아차 광주공장에만 무려 75%, 김씨는 물론 탈락하고도 남을 늙은 노동자였다.



 강성 노조 현대차 지부는 경영진을 밀어붙여 2016년까지 3500명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약속을 따냈다. 분기탱천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철탑 위로 올려 보내 쟁취한 전과였다. 올해 경영진은 약속대로 800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노조가 보태고 양보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근속연수가 짧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신분 전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강성 노조와 경영진은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한 완충지대를 설정했고, 거기에 공씨가 들어 있었다. 공씨는 소모품으로 분류된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자율성을 결행했던 것이다. 이것이 연 노동 2400시간, 평균 연봉 9500만원을 자랑하는 세계적 자동차 공장 현대차 노조가 투쟁으로 이룬 인간다운 결과다. 그 높은 연봉을 해외 공장 이익금으로 충당한 지 오래되었다.



 이게 어디 현대·기아차뿐이랴. 한국GM공장은 지난해 3000억원 적자가 났는데, 보너스와 각종 수당을 합한 액수를 ‘통상임금’으로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8000억원에 달하는 추가 임금을 지급했던 결과였다. 미국 GM본부는 노조가 점령한 한국 공장의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철옹성 노조가 세력 행사에 몰입하는 동안 한국 자동차산업은 곧 중국에 먹힐 예정이고, 결국 정규직 고용도 훼손될 것이다. 기둥뿌리 썩는다는 게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경영진이 좀 버티면 되지 않는가?



 정씨 일가의 그 우람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철옹성 노조는 막강 군단이다. 현대·기아차가 마지노선에 밀려 생산 중단을 결정한다고 가정해 보라. 애써 개척했던 해외시장은 도요타로 넘어갈 것이고, 1000여 개 국내 협력업체는 부도 사태가 나고, 50여만 명에 달하는 하청 노동자들은 생계 파탄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재벌 대기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은 때에 ‘조업 중지’는 사회적 자살 행위임을 잘 아는 노조는 무소불위의 진군가를 오늘도 합창한다. 분신과 자살이 일상적으로 감행되는 노동 현장을 일상적으로 제조하면서 말이다.



 ‘무적의 노조’를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누가 타이를 수 있으랴? 대통령? 국회? 혹은 전태일 열사의 원혼? 90년대 초,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공적 조직이 노조였다면, 2013년에는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때에는 노조를 신성한 의무와 공공의식으로 단련시켰던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지금은 독점 이익에 눈먼 선동가들, 귀족 노조화를 재촉하는 탐욕의 정치꾼들이 ‘금단의 문’을 지킨다. 비난받는 대기업도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하지만, 막강 노조의 진군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환란보다 더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것임을 이제 시민들도 알아차렸다. 시민들이 등 돌린 노조는 결국 존립 근거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제 자숙해도 늦지 않다. 제발 돌아오라, 시민의 품으로.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바로잡습니다  칼럼 내용 중 일부가 사실과 달라 바로잡습니다. 칼럼은 ‘한국 GM이 통상임금 소송 관련 대법원 판결에 따라 임금 8000억원을 지급했다’고 했으나, 아직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지 않았으며, 8000억원은 장부상 예비 비용으로만 처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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