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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대체 언제 음악을 편하게 즐길래?

중앙선데이 2013.04.20 22:39 319호 27면 지면보기
EMI
지난 4월 14일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의 부음을 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때가 되어 세상을 떠나는 숱한 노장 가운데 하나라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장영주가 떠올랐다.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데뷔 음반 이후 EMI에서 두 번째로 출시된 장영주 음반의 레퍼토리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콜린 데이비스가 지휘를 맡았다.

[詩人의 음악 읽기] 소비 혹은 탐구의 자세

베를리오즈 리코딩으로 전성기를 보낸 데이비스의 유명 음반 대신 어린 장영주(위 사진)의 것을 꺼내 다시 들어본다. 보송보송한 열두 살 소녀와 60대 중반을 넘긴 할아버지 지휘자의 만남은 어떤 결과를 낳았던가. 편했다. 물살이 흘러가듯 아주 듣기 편하고 아기자기한 사운드가 장영주와 데이비스의 차이콥스키였다. 심지어 1악장 말미의 빠르고 격한 패시지조차 재잘재잘 수다 떠는 소리인 양 들렸다. 앙드레 프레빈과 함께 했던 젊은 정경화의 같은 곡 녹음이 강렬한 집중과 긴장을 낳는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열세 살의 안네 소피무터가 카라얀과 함께했던 첫 음반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과 비교해봐도 마찬가지다. 소피무터의 바이올린이 예민한 초절정 감성으로 짜릿함이 담겨 있는 것과 달리 장영주 연주는 차분하고 미려하다. 나른한 오후의 평온 같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다소 무색무취한 듯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데이비스와 적합한 조합이 아닌가도 싶다. 이런 연주는 백뮤직처럼 늘 들려와도 좋을 것 같은데 다만 일삼아 찾아 듣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좀 별스러운, 그러나 매일 먹기는 버거운 별식과 날마다 입에 올리는 평상 음식이 있다면 어느 쪽이 더 나은 건가?

장영주와 콜린 데이비스 경. [galerie.liternet.ro]
밥 먹듯이 듣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이 있다. 편안한 장영주와 정반대 이유로, 그러니까 부담스럽지만 특별한 감회가 실리는 음반들이 있는데 최근에 그런 것이 하나 있다. 얼마 전 출시된 지미 헨드릭스의 'LP 신보'다. 40여 년 전에 죽은 로커의 신보가 웬일일까 싶지만 이젠 놀랍지도 않다. 해체된 지 오랜 비틀스의 신보, 죽은 지 오랜 존 레넌의 신보가 뜬금없이 나오고는 한다. 세월이 가도 대중의 사랑이 식지 않는 뮤지션의 경우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데모 테이프나 라이브 리코딩을 찾아내 신보로 출시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2010년에도 40년간 숨어 있던 정규 스튜디오 앨범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된 ‘밸리즈 오브 더 넵튠(Valleys of the Neptune)’ 신보가 나왔었는데 이번에 또 나왔다. ‘피플, 헬 앤드 에인절스(People, Hell and Angels)’라는 타이틀 역시 그렇게 빛을 본 헨드릭스의 이른바 ‘신보’다. 그 음반이 들어온 날 마침 사람들 방문이 있었다. 이 시끄럽고 지저분한 기타 소리와 못 부르는 노래가 왜 좋은지 어떻게 납득시키나? 오버블로라고 기술적 한계를 벗어난 자유자재함, 퍼즈톤이나 노이즈를 음악의 재료로 만들어버린 혁신성, 일렉트릭 기타를 록의 중심 악기로 올려놓은 주법과 테크닉의 개발, 그 무엇보다도 록 스피릿이라고 불렀던 젊은이들의 반항적 시대정신…. 이 모든 요소가 전후 맥락 속에 함께 다가와야 시끄러운 그의 음악이 ‘감상물’로 빛난다. 그런데 그렇다고 ‘퍼플 헤이즈’ 같은 곡을 생활의 배경음으로 밥 먹듯이 들을 수 있겠는가.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가볍게 헨드릭스 한 곡? 그런 건 어렵다. 헨드릭스는 특별하게 마음먹고 새겨듣는 별식의 음악이다.

클래식 음악에도 ‘헨드릭스’가 참 많다. 사람들이 모차르트, 베토벤을 듣듯이 100년 후에는 자기 음악을 일상적으로 들을 거라고 장담했던 쇤베르크의 유명한 호언장담은 실현되지 못했다. 사방에 쇤베르크보다 더 기괴한 사운드가 흘러 넘치는 세상이지만 음악을 ‘감상’한다고 하면 여전히 고전, 낭만, 바로크가 대세다. 거기에 별 같고 교과서 같은 거장 연주자들이 부동의 자리를 잡고 꿈쩍도 않는다. 현대음악은 거의 대부분 별식 노릇만 한다. 엘리엇 카터의 현악4중주나 첼로 소나타를 들어보면 참으로 아름답고 신선한데 왜 베토벤처럼 자주 듣게 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듣기 편치 않은 음악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이 많다. 음악을 즐기거나 소비하기보다는 탐구의 영역으로, 혹은 일말의 겉멋으로 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젊을 때 읽은 김승옥 소설의 구절이 생각난다. ‘이봐, 언제 마음 편할래? 언제 남들 작품을 편하게 즐길 거야?’ 소설 속 문학 지망생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도통 순순히 읽어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문학작품이든 혹은 음악이든 모든 긴장과 욕망을 다 떨쳐버리고 마냥 즐기는 상태에 도달해보고 싶다. 그러면 일기예보나 장학퀴즈 시그널 같은 보케리니, 하이든 트럼펫 곡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성숙한 장영주의 짙은 스모키 화장발도 한층 예뻐 보이리라. 진지하게 집중하기에는 너무 명랑한 장영주류…. 아, 갑자기 심오해져버린 미도리가 떠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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