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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카드 쥐고도 돌다리 두드려 국익 지키다

중앙선데이 2013.04.20 23:05 319호 24면 지면보기
1896년 솔즈베리 총리(왼쪽)가 영국을 방문한 중국의 실력자 이홍장(당시 73세·가운데)을 만나고 있다. [사진 김명호 교수]
영국의 20세기 첫 총리는 솔즈베리 경(1830~1903)이다. 19세기 마지막 영국 총리이기도 하다. 본명이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인 그는 뼈대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3대 솔즈베리 후작 작위를 세습했다. 열 살 때 이튼에 진학했으나 동료 학생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5년 뒤 학교를 떠났다. 이후 옥스퍼드대 졸업 뒤 변호사 공부를 하던 중 건강이 나빠져 1851~1853년 케이프식민지(지금의 남아공)와 호주·뉴질랜드 등을 여행했다. 독서와 식물 가꾸기를 좋아하던 허약한 소년은 대영제국의 미래 비전과 국제 감각을 갖춘 성인이 돼 귀국했다. 이때 넓힌 견문은 일평생 자산이 됐다. 그는 총리가 됐을 때 전임자들이 으레 겸임했던 이름뿐인 재무장관 대신 할 일이 정말 많은 외무장관 자리를 스스로 맡았다.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① 솔즈베리 경

솔즈베리 [위키피디아]
1853년 23세에 지역구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13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1867년 부친이 세상을 뜬 뒤 귀족이 맡는 상원의원 자리도 물려받았다. 솔즈베리는 세습 상원의원으로서 총리를 맡은 마지막 영국 정치인이다. 1874년 인도장관, 1878년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1881년엔 보수당 당수가 됐으며 1885~1886년, 1886~1892년, 1895~1902년 세 차례 13년 동안 총리를 맡았다. 역대 최장수 총리 중 한 명이다. 특이하게도 총리 겸임을 포함해 외무장관을 네 차례 지냈다.

독·미·러와 동맹 맺지 않고 ‘위대한 고립’
솔즈베리가 활약하던 시대는 대영제국의 전성기였다. 인도를 차지하고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동시에 독일·미국·러시아 등 후발 산업국가들이 영국에 도전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솔즈베리는 이런 난국에서 ‘위대한 고립’ 정책으로 영국의 국익과 위상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 핵심은 어떠한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 것이었다. 특정 국가와 동맹을 맺으면 동맹국의 적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미움을 살 수 있어서였다. 당시 최첨단 산업국가이자 무역대국이었던 영국으로선 세계 시장과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최대 국익이었다. 고립 정책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세력 균형자 역할을 자임했다.

19세기 후반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렐리,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화려한 언변과 휘황찬란한 정치 스타일로 유명했다. 하지만 솔즈베리는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으며 품위를 중시했다. 큰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먼 미래를 내다보며 조용히 실천했다. 예일대 교수인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총리 시절 미국·일본·독일이 부상하자 영국 정계에선 이들의 기를 꺾을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솔즈베리가 이를 무시하자 의원들이 “솔즈베리 총리, 당신이 생각하는 외교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질책했다. 솔즈베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국의 정책은 하류로 천천히 떠내려가는 작은 보트에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끔 외교라는 노를 저어주는 것이다.(English policy is to float lazily downstream, occasionally putting out a diplomatic boathook to avoid collisions.)”

이런 비유는 당시 의원들로부터 “정책이 없는 게 정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솔즈베리의 이런 태도는 어느 국가에서 여러 가지 위기가 동시에 발생할 때 적용하는 고전적인 교훈이 됐다. 영국 역사책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케네디는 “여러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상황에선 입을 다물고 주변 상황을 관망하면서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는 게 솔즈베리의 교훈”이라며 “요즘 정치 지도자들은 먼 장래는 고려하지 않고 당장의 성과를 위해 빠른 길만 가려는 경향이 커 안타깝다”고 말했다.

“떠내려가는 보트서 가끔 노 젓는 게 외교”
솔즈베리의 국제정치에는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힘으로 완전히 제압할 준비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다른 나라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충분히 제압할 힘을 확보하기 전까진 상대방을 코너로 모는 일을 절대 피했다.

“어떤 대응을 할 때는 그 반작용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철저히 고려해야 한다”는 말도 솔즈베리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실제로 모든 카드를 다 쥐고 있는 유리한 상황일망정 솔즈베리는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들겼다. 어떤 조치를 취할 땐 먼저 일이 꼬이거나 상황이 악화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부터 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면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신흥국가에 맞서기 위해 세계 최강의 해군력에 만족하지 않고 2위(프랑스), 3위(러시아)의 함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함대를 보유하는 정책을 추구한 것도 그중 하나다. 그 전까지 영국은 해군력 2위 국가보다 30% 정도 우세한 해군력을 갖는 걸로 만족했다. 하지만 공업력과 국력을 바탕으로 후발국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군비를 증강한 결과 영국은 한동안 후발국가들의 정면도전을 피할 수 있었다. 솔즈베리는 신흥국가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선 당장 대응해 서둘러 주먹질을 하기보다 압도적인 역량을 쌓는 게 우선한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신중함의 리더십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덕에 솔즈베리는 소심한 게 아니라 현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당시 확산되던 민주주의 바람에 대응하면서 보수주의·귀족주의 신념을 지켰다. 예컨대 “무슨 일이든 일단 발생하면 나중에 잘못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이익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안정을 중요시한 그는 선동적인 자유주의와 과도한 민주주의를 모두 억누르면서 정치적인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그는 1867년 보수당 소속의 벤저민 디즈렐리 총리가 자신이 반대하는 노동자 참정권 확대 법안에 대해 찬성으로 돌아서자 인도장관 자리를 사임했을 만큼 확고하게 보수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디즈렐리는 이 때문에 그와 사이가 벌어졌지만 1873년 그를 외무장관에 발탁했다. 솔즈베리는 디즈렐리 사후에 후임 총리를 맡았다.

인종·민족 편견 … 보어전쟁 때 잔혹한 진압
솔즈베리는 총리 재임 기간엔 양보와 대화를 할 줄 아는 융통성 있는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선보였다. 디테일은 양보하되 큰 원칙은 반드시 챙기는 선 굵은 스타일로 발전한 것이다.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기 위해 반대파에 과감하게 양보하는 정치적 통합 능력도 발휘했다. 당시 자유·보수 양당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지방자치법을 통과시켜 정치적으로 중요한 런던의 자치를 허용했다. 또 학비를 없애고 무상교육을 하는 보통학교 교육법, 산업재해 노동자의 치료비를 업주가 부담하게 한 노동자보상법 등 시대 흐름에 맞는 법률엔 과감하게 양보했다. 보수주의자 파벌들을 설득해 당세를 확고히 했다.

국내적으로는 당시 팽창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지도, 지원하지도 않는 방관 정책을 펼쳤지만 국제 무대에선 영국의 국익을 확대하는 데 충실했다. 솔즈베리가 대정치가 시대의 마지막 거물로 묘사되는 이유다.
그의 최대 약점은 인종·민족 편견이었다. 젊은 시절 해외여행 도중 당시 케이프식민지에 살던 네덜란드계 보어인이 현지 영국계보다 인구가 세 배나 많다는 사실에 경악해 이들을 과도하게 경계했다. 1899년 보어전쟁 때 반란을 일으킨 보어인을 잔혹하게 진압한 배경이라는 관측도 있다. 아일랜드계 의원들이 반대파인 자유당을 지원하자 아일랜드 자치법을 한 구절 한 구절 재검토할 만큼 신경을 썼다.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에 열중해 마지막 제국주의자 총리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그는 청교도적인 검소한 생활을 지켰다. 1886, 1892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공작 작위를 제의받았으나 사양했다. 공작의 품위를 지키는 데 비용이 너무 들고 생활 방식이 바뀌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는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한 이듬해인 1902년 부인이 세상을 떠난 데다 건강까지 나빠져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인생 황혼기에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그는 조카인 아서 밸푸어에게 총리직을 물려줘 줄기차게 비난을 받았다.



글 싣는 순서
1 솔즈베리 경(보수당)
고립정책과 점진적 개혁 추진
2 허버트 애스퀴스(1908~16·자유당)
해군 증강과 복지정책 추진
3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1916~22·자유당)
1차 대전 승리 이끌고 복지국가 틀 마련
4 네빌 체임벌린(1937~40·보수당)
협상 통해 전쟁 막으려다 실패
5 윈스턴 처칠(1940~45, 1951~55·보수당)
피와 땀과 눈물의 단결 리더십
6 클레멘트 애틀리(1945~51·노동당)
미국과 손 잡은 중도좌파 실용주의
7 헤럴드 맥밀런(1957~63·보수당)
1차 대전에 참전한 노블레스 오블레주
8 해럴드 윌슨(1964~70, 1974~76·노동당)
정적을 각료로 기용하고 경제 회생
9 마거릿 대처(1979~90·보수당)
영국 복지병 치유한 철의 리더십
10 토니 블레어(1997~2007·노동당)
‘쿨 브리태니아’로 창의 리더십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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