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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타멜란, 작년 러시아 여행 뒤 턱수염 기른 채 귀국

중앙선데이 2013.04.21 00:05 319호 4면 지면보기
보스턴마라톤 테러의 유력 용의자인 차르나예프 형제의 출생지 체첸이 국제사회의 주목 대상이 됐다. 현재 러시아에서 어느 정도 자치가 허용된 공화국인 체첸이 국제적 주목을 받은 것은 1994년 1차 체첸전쟁 때다. 이후 2차 체첸전쟁 때 다시 주요 뉴스가 되긴 했지만 관심권에서 멀어졌다가 이번에 느닷없이 국제 테러전선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 형제는 탈(脫)러시아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 반군의 전위대인가, 아니면 이슬람 지하드의 투사인가.

보스턴 테러 용의자 형제의 행적 추적해보니

2002년 7월 1일 어린 아들의 손을 잡은 관광객 행색의 캅카스인 부부가 미국에 입국했다. 실제 신분은 난민인 이들은 곧 망명을 신청했다. 당시 8세이던 꼬마가 11년 뒤 보스턴 테러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19일 체포된 조하르 차르나예프다.

미국에 정착하게 된 아조르 차르나예프 부부는 당시 카자흐스탄에 있던 큰아들 타멜란과 두 딸을 불렀다. 타멜란은 입국할 때 이미 영주권을 갖고 있었다는데 입국 시점에 대해선 견해가 엇갈린다. CNN은 2003년 7월 19일과 2006년 9월 6일의 두 날짜가 있다고 전했다. 차르나예프 가족의 이전 행적은 명확지 않다.

람잔 카디로프 체첸공화국 대통령은 보스턴 테러 직후 대변인을 통해 “그들은 20년 전 체첸을 떠나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으로 갔고 1999년 타멜란과 조하르가 러시아로 돌아와 다게스탄에서 공부한 것 같다”고 발표했다. 다게스탄은 체첸공화국 북부와 인접한 자치공화국이다. 그러나 가족이 2001년 다게스탄으로 이주해 수도 마하치칼라에서 1년 정도 살았다는 보도도 있다.

1994년 12월부터 99년 8월까지 진행된 1차 체첸전쟁. 당시 수도 그로즈니는 러시아의 포격과 폭격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저 뒤 큰 건물은 체첸공화국의 청사이며 동시에 반군의 본부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사진 XY freshness]
보스턴마라톤 테러 사건의 용의자를 19일 검거한 경찰이 한 시민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경찰의 첫마디는 “정의가 승리했다”였다. [보스턴 AP=뉴시스]
2012년 9월 11일 미국 시민권 받아
미국과 러시아 언론이 추적한 차르나예프 형제의 ‘미국 내 움직임’은 크게 복잡하지 않다.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진 뒤 아버지 아조르는 다게스탄으로 돌아갔고 어머니는 미국과 다게스탄을 오갔다. 그들은 마하치칼라에서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타멜란과 조하르의 미국 생활도 주변에서 보기엔 문제가 없었다.

아마추어 권투선수였던 타멜란은 2004년 골든 글러브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서 우승한 뒤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좋다. 체첸을 대표할 수 없다면 러시아보다 미국 대표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비사교적이어서 2010년 주변에 “난 친구가 없다”고 했지만 캐서린 러셀과 결혼해 딸도 낳았다. 조하르는 전형적인 10대처럼 행동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중요한 건 돈과 경력”이라는 멘트까지 남겼었다.

2011년 미 연방수사국(FBI)이 ‘인터넷 활동’을 이유로 조사했지만 ‘무혐의’ 처리됐다. 그리고 이듬해 9월 11일 이들 가족은 모두 시민권을 받았다. 시민권 수여 행사에 타멜란도 참석했다.

그러나 외신을 종합하면 타멜란의 행적에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형제들의 숙모 마렛 차르나에바는 “타멜란이 3년 전부터 이슬람교에 심취해 하루에 기도를 다섯 번씩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인터넷에 반영된 타멜란의 ‘이슬람적 행동’은 FBI의 조사로 이어졌었다. 마렛 차르나에바는 이어 “애들 엄마가 9·11은 미국인이 이슬람을 혐오하게 만들려는 미국 정부의 음모라는 말을 했다”면서 “큰아들(타멜란)이 그렇다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형제의 집으로 체첸인들이 몰려와 격렬한 토론도 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사교’의 범위를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타멜란의 행적 중 가장 의심스러운 기간은 2012년 1월 이후 6개월 사이다. 미국 CNN은 “그가 2012년 1월 러시아의 셰레메티예보를 여행했다”고 보도했다. 셰레메티예보는 모스크바 인근 국제공항이다. 타멜란은 6개월 뒤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모습이 달라졌다. 턱수염을 기른 것이다.

26세 이슬람교 성인이면 대수롭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턱수염은 지하드 전사 혹은 체첸 반군의 트레이드 마크인 데다 6개월 만에 급격하게 달라진 모습은 뭔가 변화가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9월 11일 미국은 그에게 미국 시민권을 준다. 이 결정적인 6개월 사이 타멜란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현재로서는 없다. 그가 사망해 추적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머무르는 다게스탄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체첸에서 ‘피로 물든 민족의 수백 년 역사’에 눈을 떴다면 그가 급진 성향으로 변했을 가능성은 높다.

체첸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조지아(옛 그루지야)공화국 북쪽 접경과 닿아 있으며 북으로는 험준한 캅카스 산맥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면적은 1만9300㎢로 우리의 경상북도만 하다. 종교는 이슬람교 수니파. 5000년 역사를 가졌다고 자부한다.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홍완석 소장은 “제정 러시아와의 충돌에서 체첸의 피는 흐르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1차 캅카스 전쟁(1785~1791년), 2차 캅카스 전쟁(1834~1859년)에서 체첸인은 침략자 제국 러시아에 ‘온 힘을 다해 저항했고’ 그만큼 ‘무자비한 탄압’이 되돌아왔다. 1859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체첸은 1917년 10월 사회주의혁명 때 독립을 시도했다가 내분으로 실패했다. 옛 소련 시절 ‘체첸-잉구세티아공화국’의 지위를 받았으나 1943년 독일군이 다가오자 해방군으로 맞아 함께 소련과 싸웠다가 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1944년 2월 50만 체첸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데 이 과정에서 23만여 명이 사망했다.

1994년 러시아-체첸 간 갈등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91년 11월 최초의 체첸 출신 소련군 장성 조하르 두다예프가 전역하며 ‘체첸 독립’에 뛰어들었다. 체첸인에겐 독립을 위한 민족적ㆍ역사적 이유가 있었지만 러시아로서는 근본적으로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독립을 허용하면 인근 캅카스 지역에 독립 요구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고, 또 카스피해 석유ㆍ가스를 잃고 이를 수송하는 가스관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자치권 강화로 달랬지만 결국 무력을 동원했다. 94년 12월~99년 8월 1차 전쟁은 러시아-체첸 모두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양측 주장이 엇갈리지만 러시아군은 약 1만 명 사망, 체첸 주민 사망은 5만 명으로 추계된다.

이 1차 전쟁 시기에 이들 가족은 체첸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2차 전쟁 피해는 그만큼은 안 되지만 수천 명 규모로 추정된다.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사태’의 인명 피해를 웃도는 대형 내전이며 양측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증오의 골을 만들었다. 지금 체첸 등 캅카스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극동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유혈의 역사에 젊은 타멜란의 감수성이 민감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형은 미국 여성과 결혼해 딸도 낳아
이번 테러의 범행 동기에 대한 추정은 아직 가닥이 잡히진 않았다. 그러나 대개 ①성격 파탄자의 단독 범행 ②체첸 문제의 국제화를 노린 범행 ③이슬람 지하드와 연계된 범행 가능성이 집중 거론된다. 현재로서는 성격 파탄자의 범행보다 ②, ③번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더 클 수 있다.

서방에서는 2000년대 초까지 ‘이슬람의 성전인 지하드와 분리독립 운동인 체첸 반군의 활동의 연계는 크지 않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지하드는 ‘이슬람 교도를 제국주의로부터 구하고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어서 ‘분리독립’ 같은 국지적 이슈와 공동 이해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1ㆍ2차 체첸전쟁에 과격 이슬람 조직원들이 참전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체첸은 이슬람 지하드의 관심권에서 배제됐다는 것이다.

2006년까지도 체첸에서 알카에다가 활동한 증거가 있지만 이는 ‘공동 연대가 아닌 개별 활동’이란 분석이 강했다. 실제로 당시까지 체첸 반군의 활동은 러시아 내로 국한됐다. 체첸에 들어선 친(親)러시아 성향의 정부가 반군 소탕을 밀어붙이면서 반군의 세력도 약화돼 이후 활동은 체첸 이외 지역에서 벌어졌었다.

2002년 모스크바 돔 쿨투루이 극장 테러로 100여 명의 인질이 죽고, 2004년 러시아 체첸 인근 북오세티야공화국 내의 베슬란 학교 인질 사태로 330명이 죽었다. 그러나 양상이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폭스뉴스는 ‘체첸 테러가 최초 서방 진출’이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도 수차례 있었다. 2010년 9월 덴마크에서는 두카에브라는 체첸 테러리스트가 단독으로 코펜하겐 호텔 폭탄 테러를 했다가 체포됐다. 2012년 8월 스페인에서도 이슬람 테러 하부 조직원 3명이 체포됐는데 그중 두 명이 체첸인이었다.

2013년 1월 2일에는 시리아 내전에 참전한 체첸 반군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었다. 이런 점들은 알카에다와 체첸의 연관성을 시사하며 ‘체첸을 매개로 한 타멜란과 알카에다의 미국 테러’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게 될 경우 체첸 문제는 국제화되고 미국과 러시아에는 체첸 테러 대응이라는 새로운 현안이 발생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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