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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없는 여성이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 … 열린 BBC 채널

중앙일보 2013.04.20 00:48 종합 21면 지면보기
영국 BBC의 어린이 채널 `Cbeebies`에서 장애인 여성이 진행을 하고 있다. [BBC 화면 캡쳐]
여기 한 어린이 TV 채널이 있습니다. 시청률 높은 오전 시간대 프로그램 중 하나는 ‘수화 배우기’로, 진행자가 어린이 서너 명에게 간단한 단어 몇 가지를 수화로 표현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출연하는 어린이 중 절반 이상은 다운증후군·ADHD 등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습니다. 자신도 장애가 있지만 청각장애가 있는 친구들을 이해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는 거죠. 저는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이가 아무 문제 없이 수화를 배울 수 있다는 걸 이 프로그램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김진경의 취리히통신]

 프로그램 사이엔 고정 진행자들이 등장하는데요. 그중 한 명은 오른팔 팔꿈치 아래가 없는 여성 장애인입니다. 저는 TV를 가까이에서 보기 전까진 이 여성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장애가 있는 팔로 동화책을 넘기고, 장난감을 옮기고, 다른 진행자들과 춤도 추기 때문이죠. 장애인임을 전혀 부각시키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이어갑니다.



 장애인 대상 채널이냐고요? 아닙니다. 영국 BBC의 어린이 전용채널인 ‘시비비스(Cbeebies)’ 얘기입니다. 이 채널의 ‘정치적 올바름’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진행자의 인종과 성별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볍게 배신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의사 역을 맡은 진행자는 인도 출신이고, 안전모를 쓰고 공학 실험을 진행하는 사람은 화장을 짙게 한 금발 여성이죠. 원시인 부부가 등장하는 한 역할극에서 아내는 백인, 남편은 흑인입니다.



 까만 생쥐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도 있는데요. 이 생쥐들이 쓰는 영어는 더 보태고 뺄 게 없는 현대 흑인 영어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문법에 따르자면 빵점짜리 영어죠. 그런 영어로 된 애니메이션을 왜 어린이 채널에서 내보낼까요? TV를 보는 아이들 주변에 실제로 그런 영어를 쓰는 흑인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건대 처음 이 프로그램들을 보고 좀 당황했습니다. 장애인 여성 진행자의 말 대신 그의 팔꿈치에만 눈이 갔고, 장애아들을 보면서 ‘쟤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지’라며 혼자 초조해했죠. 적응은 엄마보다 16개월짜리 제 딸이 먼저 하더군요. 딸은 아직 말을 못합니다. 그런데 이 채널을 한동안 보더니 어느 날 ‘친구’라는 뜻의 수화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국어가 터져나오기도 전에 ‘가장 강력한 외국어’를 먼저 익힌 셈이지요.



 아이들을 위한 TV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굳이 대단한 걸 가르치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장애인, 남성과 여성이 어울려 살아가는 ‘바람직한 현실’만 잘 반영해도 성공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비비스에 나오는 어린이 노래의 가사는 되새겨볼 만합니다. ‘다른 건 좋은 거야’ ‘난 내 특이한 코가 좋아, 나의 일부분이니까’.



김진경 기자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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