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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사랑은 없고 접속만 있다

중앙일보 2013.04.20 00:42 종합 22면 지면보기
리퀴드 러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조형준 옮김

새물결, 343쪽

1만8500원




로베르트 무질(1880~1942)의 주인공이 ‘특성 없는 인간’이라면,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인공은 ‘유대 없는 인간’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무질의 소설은 위대한 부르주아 개인들의 사회가 대중사회로 이행하던 세기말의 상황을 묘사한다.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특성 없는 인간』 등을 남긴 무질의 ‘특성 없는 인간’은 산업혁명이 낳은 대중사회의 평균적 인간들을 가리킨다. 그것이 20세기형 인간이라면,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바우만의 ‘유대 없는 인간’은 정보혁명을 완료한 21세기의 전형적 인간상이다.



 『리퀴드 러브』라는 제목은 바우만이 내세운 ‘유동적 현대’(liquid modernity)의 개념과 관련 있다. 그것은 ‘고정된 현대’(solid modernity)에 이어지는 현대성의 새로운 단계다. 그 단계에서 인간들은 뿌리를 잃은 존재가 되고, 그들 사이의 관계 역시 영속성과 지속성을 잃고 일시성과 반복성을 띤다는 것이다. 『리퀴드 러브』는 이 사회학적 일반론을 ‘사랑’에 적용시킨 일종의 미시사라 할 수 있다.



 ‘유동화’의 경향은 이미 산업화 초기부터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극에 달하는 것은 역시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조직’(organization)에서 ‘네트워크’(network)로 변한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일 것이다. 오늘날 인간관계는 원하면 언제든지 ‘접속’했다가 ‘차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사랑도 여차하면 ‘삭제’할 수 있는 것이 됐다.





 유동성의 개념은 실은 발터 베냐민(1892~1940)이 말한 ‘원작과 복제’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베냐민은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원작을 ‘일회성’과 ‘지속성’으로, 복제를 ‘반복성’과 ‘일시성’으로 특징짓는다. 가령 모나리자 원작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고(일회성), 그 존재가 다빈치의 손에서 창작되던 시점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면 (지속성), 그것의 복제사진은 도처에 존재하고(반복성), 만들어졌다가 금방 폐기된다(일시성)는 것이다.



 장인적 생산의 산물은 유일물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수명이 다하도록 사용했다. 하지만 하나의 프로토타입(원형)으로 수많은 스테레오타입을 찍어내는 대량생산의 산물은 반복적이며 일시적이다. 상품의 사이클은 점점 짧아진다. 오늘날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를 수명이 다하도록 쓰는 사람들은 없을 게다. 상품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폐기된다. 그래야 순환이 빨라져 경제가 돌아간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사랑’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속성 없는 관계에서 오는 결핍감을, 대중은 이 사람 저 사람과 일시적 사랑을 반복함으로써 보충하려 한다. 지속적 관계를 요구하는 결혼은 위험한 투자다. 설사 결혼을 해도 서로 구속하지 않는 ‘가벼운 결혼’이 선호된다. 아이를 갖는 것은 경제성이 없는 투자로 여겨진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풍조’ 역시 유동적 현대의 징후 중 하나다.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는 텔레비전이 부르주아 가족을 해체했다고 말한다. 과거에 식구들은 눈을 마주보며 함께 식사를 했다면, 식구들의 시선은 이제 텔레비전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 일을 지금은 스마트폰이 하고 있다. 오늘날 가족은 한 자리에 모여도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각자 제 스마트폰만 들여다볼 것이다. 가장 내밀한 가족 관계에서조차 이렇게 현대인은 ‘유대 없는 인간’이 돼가고 있다.



 언젠가 여양 진(陳)씨 종친회에서 연락이 왔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아득한 옛날에 살았던 시조(始祖)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나 보다. 하지만 내게는 족보를 따지는 문화 자체가 거추장스런 속박으로 여겨질 뿐이다. 핵가족마저 미립자로 해체되는 시대에 ‘종친’이라는 대가족의 유대를 지속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이 내게는 솔직히 우습게만 느껴진다. 이게 웬 시대착오란 말인가.



 시야를 사회 전체로 확장시키자. 우리는 인터넷 카페나 채팅을 통한 구속력 없는 만남을 더 ‘쿨’하게 여긴다. 고용시장에서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져, 오늘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유목민이 됐다. 이렇듯 바우만은 ‘난민수용소’에서 미래사회의 모습을 본다. 난민수용소는 유동적 현대의 삶의 패턴이 시험되고 예행되는 실습장이다.



 그가 ‘난민수용소’를 끔찍한 호러 버전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배척당하는 난민들 사이에는 유난히 강한 유대감이 존재한다. 200년 전에 칸트는 ‘공동의 시민권을 통한 인류의 완벽한 통합’이라는 이상을 제시했다. 특정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영원한 임시적 장소’에 머무는 난민들의 강한 유대는 동시에 무정부적 삶의 표상일 수도 있다. 오늘날의 난민들은 (미래적 삶의) 전위 역할을 하고 있다.



 무정부주의는 굳이 국가기관 없이도 시민들 사이에 자발적 질서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리킨다. 그 사회의 시민들은 소통을 할 때 한나 아렌트의 원칙을 따를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 자체는 신에게 맡겨라.” 바우만이 실현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실현의 전망을 밝게 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그래도 시도해야 한다.”



 바우만의 분석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준다. 21세기 생활세계의 사회학을 얻어내는 데에 미디어 철학의 여러 성찰을 원용했기 때문이다. 대안의 모색 역시 기시감을 준다. 이탈리아 철학자 로르조 아감벤을 비롯한 여러 정치철학자들의 성찰을 원용했기 때문이다. 기술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진단은 진부하고, 처방은 모호하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1~3』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등.



지그문트 바우만(88)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하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운동 절정기에 국적을 박탈당하고 조국을 떠났다. 이스라엘로 건너갔지만 팔레스타인 참상에 절망을 느끼고 71년 리즈대 사회학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다. 저서 『액체근대』 『유동하는 공포』 『쓰레기가 되는 삶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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