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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음악, 바람은 시 … 그 섬에서 쉬고 싶다

중앙일보 2013.04.12 04:00 Week& 2면 지면보기
언덕이나 산이 없는 가파도는 바람이 거세다. 대부분의 집들은 섬에서 바람이 그래도 덜 부는 하동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앞바다에 납작 엎드려 있는 섬 가파도. 예전의 가파도는 국토 최남단 마라도 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섬이었다. 2010년 4월 올레길이 생긴 이후 관광객이 부쩍 늘어났지만, 가파도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은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사람들은 섬을 한 바퀴 휙 돌고는 얼른 섬에서 나갔다. 그 맛있다는 전복성게알죽도, 뿔소라도 안 먹고 가버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리밭을 간직한 섬인데 말이다.

전봇대 제로, 탄소 제로 … 가파도는 명품 섬으로 변신 중



올레꾼 빠져 나가면 고요한 섬



“가파도는 조용한 섬입니다. 쉬어가기에 좋은 섬이지요. 시간을 갖고 여유 있게 둘러보세요.”



가파도에 들어가기 전에 서귀포에서 만난 제주올레 안은주 사무국장이 특별히 당부를 했다. 안 국장의 당부를 가슴에 안고 모슬포항으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가파도행 티켓을 끊으려고 하니 매표원이 물었다.



“몇 시에 나오실 거예요? 가파도 구경하는 데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거든요. 다음 배 타고 나오시면 돼요”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안 국장이 미리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면 그냥 “예”라고 대답할 뻔했다.



가파도 들어가는 배는 100명이 넘는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20분쯤 달려 가파도 상동선착장에 도착하자, 관광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우르르 제주올레 안내판으로 몰려갔다. 가파도 올레길은 약 5㎞ 거리다. 언덕길도 없어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함께 섬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음 배로 죄다 모슬포로 돌아갔다.



올레꾼이 빠져나간 섬은 조용했다. 쉬엄쉬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큰 아끈여’ ‘옹짓물’ ‘개엄주리코지’ 등 외계어 같아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지명이 수두룩했다. 3대째 가파도에 살고 있다는 이흥택(65)씨에게 물었더니, 섬사람 특유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어. 옹짓물은 먹는 물이 나온다고 해서 붙인 것 같고, 여는 암초라는 뜻이어서 큰 아끈여는 큰 암초가 있는 곳이겠지.”



섬 남쪽으로 걸어가니 바다 한가운데 편히 누운 마라도가 보였다. 물질하고 나온 해녀도 만났다. 해녀들의 말투는 서로 싸우는 소리처럼 사나웠다. 진명환(52) 가파리 이장이 “물질할 때 수압을 방지하기 위해 껌으로 귀를 막는데 물에서 나왔을 때도 그걸 빼지 않고 이야기하다 보니 목소리가 커진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정말 싸움이라도 난 줄 알 뻔했다.



왼쪽으로 살짝 튀어나온 개엄주리코지 정자에 올랐다.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귀포 쪽으로는 오름이 없어 능선이 매끈했다. 뾰족한 봉우리가 늘어선 왼편 한림읍 고산 쪽으로는 정반대 모습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자락에 20개 가까운 오름이 근육처럼 울퉁불퉁 솟아있었다.



청보리밭은 섬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었다. 가파도의 보리밭은 60만㎡(약 18만 평)나 된다. 개엄주리코지 뒤편에 있는 보리밭이 크기도 가장 크고, 경치도 제일 나았다. 해풍을 이긴 보리는 이미 무릎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가파도의 밤은 정적 그 자체였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만 들릴 뿐 인공의 소리나 불빛은 거의 없었다. 불빛이 춤을 추는 바다 건너 모슬포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요한 바닷가로 혼자 나가봤다. 바다별장 식당 벽에 누군가 적어 놓은 글이 떠올랐다. ‘찰삭이는 파도소리 음악처럼 감미롭고,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소리 시가 되더라.’



(왼쪽) 상동 선착장앞 바다 별장 식당에 붙어 있는,가파도의 추억을 담아놓은 메모지들. (오른쪽) 가파도에는 지금도 45명의 해녀가 있다


보리밭 마라톤 뒤엔 해녀와 문어 사냥



가파도는 낚시꾼이나 찾는 섬이었다. 5년 전만 해도 한해 관광객도 1만 명이 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다. 1년에 10만 명 가까운 관광객이 섬에 들어온다. 청보리축제와 제주올레 덕분이다. 청보리축제를 처음 시작한 2009년에 5만 명이 들어왔고, 올레길이 열린 2010년에는 8만 명이 넘게 들어왔다. 청보리 없는 겨울에도 하루에 500명은 족히 섬에 들어온다. 가파도는 어느새 사계절 관광지가 되었다.



옛날에는 가파도도 다른 농작물을 심었다. 바다별장 이흥택 사장이 왕년 얘기를 들려줬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고구마나 참외도 많았어. 참외 한 포대 싣고 모슬포 항에 가서 팔면 5원을 받았지. 5원도 큰돈이었어. 그래도 잘 안 됐어. 종자 보존도 안 됐고, 물을 많이 줘야 하는데 가파도는 물이 부족하잖아. 그래서 다 없어졌지 뭐.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 보리를 심었지. 보리는 그냥 파종만 해놓으면 알아서 잘 자라잖아.”



최근에는 메밀도 심어 봤지만 재미를 못 봤다. 가파도 사람들은 보리밭에 온통 메밀을 심어놓고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메밀을 수확하는 9월만 되면 태풍이 몰아쳤다. 심할 때는 태풍 다섯 개가 잇따라 통과하며 메밀밭을 쓸어버렸다. 메밀밭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된 것을 본 다음에는 메밀 농사도 접었다. 이제 가파도산 농산물은 보리가 거의 유일하다.



모슬포와 가파도를 오가는 삼영호.
하여 청보리는 가파도의 자랑이자 보물이다. 유난히 모진 바람도 보리는 이겨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파도 주민들은 청보리축제에 온 힘을 쏟는다. 5회째를 맞는 올해 축제는 오는 13일 개막해서 다음 달 5일까지 21일간 열린다. 지난해에는 하루 최대 3000여 명, 한 달 축제기간 동안 약 3만 명이 찾았다.



올해도 기대가 크다. 보리밭을 이용한 프로그램도 여럿 준비했다. 평일에는 보리밭을 걸을 수 있고, 주말에는 보리밭 사이에 난 길을 따라 마라톤 대회도 열린다. 미역·톳을 넣은 보리비빔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해녀와 함께 바다에 들어가 문어도 잡고 소라도 딸 수 있다.



글=이석희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여행정보



모슬포 항에서 가파도 상동선착장까지는 뱃길로 5.5㎞ 거리다. 평소에는 하루 네 차례 배가 운행하지만 청보리 축제기간에는 운행 횟수가 늘어난다. 주중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주말에는 오후 5시까지 한 시간(정비시간인 오후 1시 제외)마다 운행한다. 전화로만 예약을 받는다. 운임은 큰 배 ‘21 삼영호’가 편도 5000원, 작은 배 ‘삼영호’가 4000원이다. 064-794-3500. 가파도에서는 민박집이 모두 열 곳 있다. 바다별장(064-794-6885), 해녀촌 식당·민박(064-794-5745) 등이 있는데 방 하나에 4만~5만원이다. 가파도에서는 해녀가 딴 해산물을 먹어야 한다. 소라회나 문어숙회가 한 접시에 1만원이다. 보말칼국수(7000원)나 전복성게알죽(1만3000원)도 맛있다. 가파도 청보리축제위원회 064-794-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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