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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때도 고이 간직한, 할머니의 그 옷

중앙일보 2013.04.12 00:41 종합 24면 지면보기
1920∼30년대의 원삼(圓衫). 궁중에서 혹은 혼례 때 착용됐다. [사진 경운박물관]


네 살 맏증손녀를 위해 증조할머니는 삼베를 마름질해 뒀다. 혼수 1호였다. 작고한 증조할머니의 당부는 할머니에게, 어머니에게 전해 내려왔다. 맏증손녀는 시집갈 때 어른들의 말씀대로 재봉틀 돌려 속속곳을 완성했다.

경기여고 경운박물관 ‘근대 직물 100년’전



 이 속속곳은 6·25 때 피란짐에 담겼으며, 주인과 함께 늙어갔다. 주인은 10년 전 수의를 지어두면서 이 삼베 속속곳을 수의의 가장 안쪽에 넣었다. 어른들의 손길을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담아 가고 싶었다. 이 삼베 속속곳은 그저 하찮은 속옷이 아니다. 증조할머니부터 증손녀까지 4대에 걸친 여인들의 마음씀씀이가 담긴 보물이다. 수필가 안한순(92)씨의 추억이다.



 이처럼 우리 삶의 국면 국면을 함께 했던 옷들이 있다. 그때 증조할머니는 또한 미래의 사위를 위해 함경북도에서 생산되는 상질의 마직물을 도포감으로 마련해 뒀다. 할머니는 먼저 시집 보내는 고모에게 이 북포(北布)를 내줬고, 손녀 사위용으로는 대신 세모시 한 필을 다듬어 줬다. 결혼하던 날 딱 한 번 입은 이 두루마기 역시 피란길에 동행했고, 수 년 전 경기여고 경운박물관(관장 송광자)에 기증됐다.



 2003년 서울 개포동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관에 문을 연 경운박물관은 300여 동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기증으로 유물 4300여 점을 갖추게 됐다. 여고 동문 위주라는 특성상 개항기 전후의 근대복식유물로 소장품이 특화돼 있다.



 ‘근대 복식과 우리 문화’로 첫 전시를 열었던 이 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근대 직물 100년’전을 연다. 1876년 개항기 이후 1990년까지 100여 년 역사를 오롯이 담은 복식 200여 점과 진기한 직물 50여 점을 전시한다.



 한복 입고 생활하던 시기 모직물로 만든 두루마기, 1920년생인 시어머님이 스물네 살 신식 혼인 후 폐백 때 입은 장옷 등 집집마다 꼭꼭 간직해 둔 사연 많은 옷들이 박물관에 나왔다. 대부분 환갑을 넘긴 기증자 본인이, 혹은 선대부터 애장했던 것들이라 정확한 기원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이 옷들은, 결혼이나 장례 같은 인생의 중요 갈림길에 옷을 빌려 입고, 패스트 패션이라 하여 한 철 입고 버리는 옷들에 길들여진 요즘 세대에겐 오히려 신선한 역사가 됐다.



 전시는 15일부터 7월 19일까지 열린다. 전시 기간 중 부대 행사로 정정희·성옥희·박남성 등 6명의 예술가가 펼치는 ‘직조 예술, 그 올과 결’, 80명의 복식전공교수가 참여하는 한국복식학회(KOSCO)전 ‘별별 색 이야기’,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전통직물재현전, 천연염색가 이병찬씨의 전시가 이어진다. 02-3463-1336.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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