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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자기 최면에 걸린 김정은

중앙일보 2013.04.12 00:30 종합 35면 지면보기
김영희
대기자
김정은은 자신이 판 함정에 빠졌다. 그는 김씨 왕조의 후계자 지위를 확고하게 할 목적으로 국민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 우리는 핵·미사일을 가졌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 수도 워싱턴도 공격할 수 있다. 남한과 미국은 우리를 핵 보유국가로 인정하고 우리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핵도 갖고 경제도 일으킬 수 있다…. 김정은에게 이런 터프가이(Tough guy) 이미지는 필수적이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큰소리를 사실로 믿는 자기최면(Auto-hypnotism)에 걸려버렸다.



 한국과 미국은 그의 호언장담과는 반대로 가공할 첨단 억지력을 동원해 북한의 도발에 강력하고도 즉각적으로 반격할 태세다. 김정은에게 더욱 불쾌한 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태도다. 중국 국가주석은 보아오 아시아 포럼에서 어느 누구도(No one) 저만의 이익(Selfish gains)을 위해 이 지역과 세계를 혼란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가 지칭한 “어느 누구”가 북한 아니고 누구겠는가. 중국의 여론도 김정은의 무모한 핵·미사일 놀이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독일에서 기자들에게 “한반도의 핵전쟁은 체르노빌 원자로 참화는 동화로 들릴 만큼 피해가 엄청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로 유출된 방사능물질은 사람을 포함한 주변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했다.



 김정은은 지금 진퇴양난에 빠졌다. 국민의 시선을 생각하면 남한이나 미국에 물리적인 도발을 하지 않으면 체면을 잃는다. 그러나 도발에는 응징이 따르고, 그 다음 전개될 사태는 생각하기도 싫다. 원산 부근에 배치한 중거리탄도미사일로 서울이나 미군기지를 공격한다면 그건 바로 북한체제 종말의 시작임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김정은은 어쩌면 멀리 태평양을 향해 여러 발의 미사일을 쏘고는 국민에게는 한·미 전쟁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고 선전하는 것으로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는 지금부터 한·미 연합 독수리 훈련이 끝나는 4월 말 일주일이나 열흘 후까지의 기간이 되지 싶다. 그때까지 도발하지 못하면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당분간 동력을 잃을 것이다. 개성공단도 폐쇄보다는 가동중단 수준에 묶어두어 정상 가동으로 돌아갈 여지를 남겨놓았다.



 김정은이 지금 기다리는 것은 한국과 미국의 확실한 양보의 제스처다. 그의 체면을 살릴 만한 제안이다. 이런 배경에서 서울과 워싱턴에서 나온 아이디어의 하나가 대북 특사 파견이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할 만한 인물을 평양에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서울에서는 일부 여야 의원이 평양에 특사를 보내 급한 상황을 수습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지금 공식 특사는 보내는 쪽도 받는 쪽도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럽다. 한국의 경우라면 공식 특사보다는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을 평양이나 베이징이나 선양에 비공식 특사로 보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작은 도발은 큰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위기가 첨예할수록 물밑 접촉이나 제3국의 중재가 필요하다. 비공식 특사 파견은 곤경에 빠진 김정은에게는 사실상의 동아줄 효과를 낼 것이다.



 미국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과잉대응을 견제하는 것은 현명하다. B-2, B-52, F-22를 독수리 훈련에 참가시킨 것은 절반은 북한에 대한 강력한 억지력의 과시이고, 절반은 한국을 안심시키면서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확고한 물리적 억지력과 핵 불용(不容)의 원칙을 갖고 지금 시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과 대화를 모색해야 한다. 약자가 내미는 손과 달리 강자가 내미는 손은 화해를 위한 것이다. 양보도 강자가 먼저 하는 것 아닌가. 북한도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이명박 정부의 강경정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공조를 얻어 당장의 위기가 진정되고 잠깐의 숨 돌릴 틈이 생길 때를 놓치지 말고 한국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단계별 내용을, 미국은 북·미관계 정상화까지의 로드맵을 북한에 제시해야 한다.



 핵과 경제의 두 마리 토끼를 쫓겠다는 김정은에게 한국 생각대로 핵을 포기시키거나 미국 생각대로 핵확산을 포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이 없어도 체제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북한이 바라는 북·미관계 정상화가 북한의 시야에 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유인 요인이다. 위기 진정 뒤의 장기·포괄적 조치만이 북한의 다음 차례 도발 충동을 막고 북한 문제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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