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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42) 새마을운동 오해와 진실 ①

중앙일보 2013.04.11 00:56 종합 31면 지면보기
새마을운동으로 초가 지붕을 슬레이트나 기와 지붕으로 바꾼 강원도 양양군의 한 마을 전경. 1970년대 찍은 사진이다. [사진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오는 22일이면 새마을운동이 43주년을 맞는다. 새마을운동의 의미를 놓고 많은 해석이 있었다.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명과 암이 갈렸다. 1970년대 내무부 새마을담당관과 지방국장,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며 새마을운동의 시작에서부터 뿌리내리는 과정까지 체험했다. 새마을운동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2회에 걸쳐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어봤다. 내 나름의 답이다.


관제였다면 재건국민운동처럼 3년도 못 갔을 것

- 관이 주도한 운동 아닌가.



 “관이 주도한 게 아니라 관이 유도한 민·관 협력사업(民·官 協力事業)이었다. 정부가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지역사회 개발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전신인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어떻게 농민의 자율적 참여를 유도하는가’였다. 시멘트를 지급하면서 동기를 유발했다. ‘시멘트로 무슨 사업을 할 것인가’를 마을 사람들이 총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결정하라고 했다. 마을 공동의 숙원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걸 두고 토론을 하고 사업계획을 짜고 추진하도록 했다. 새마을운동은 동기 유발의 과정이었고 민과 관이 협력해서 일하는 방식이었다. 5·16 직후 추진한 재건국민운동은 관이 주도했다. 농민의 참여를 강제했고 실패했다. 새마을운동이 관제운동이었다면 10년은 물론 5년도 못 갔을 것이다. 재건국민운동처럼 2~3년 내에 사라졌을 것이다.”



 - 정부가 농촌의 노동력을 새마을운동이라는 포장 아래 무상으로 이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근대적 부역이었다는 비판이다.



 “정부는 자재를 지원하고 마을은 인력을 투자한 민·관 협력사업이 새마을 사업이다. 자기 마을의 사업을 마을 주민 스스로 해냈다. 압력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였다. 자기 집 앞의 눈을 치우는 것이 부역인가. 국도 등 큰 도로를 건설하는 데 사람들을 동원했다면 부역일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후 공공사업도, 민간사업도 아닌 두 개가 걸쳐진 사업 영역을 뜻하는 ‘제3섹터’란 유사한 개념이 생겼다. 이 역시 민·관 협력 방식의 하나다.”



 - 전국적으로 획일화된 농촌개발을 부추기지 않았나.



 “1970년대 초 몇 년에 걸쳐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가 대통령 주재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에서 소개됐다. 보고된 수십 개 마을 가운데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초기부터 사업 선택권을 마을 주민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각 마을의 특성에 따라 가장 절실한 사업부터 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모델을 놓고 따라 하라고 하지 않고 다양한 성공 사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업의 큰 흐름은 생활환경 개선사업으로 시작해 생산환경 개선사업, 그리고 소득증대사업으로 이어졌다.”



 - 새마을운동 때문에 품앗이 등 전통문화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래 우리네 마을엔 품앗이를 넘어선 향약, 두레 등 마을 공동체적인 협동 관행이 있었다. 몬순(계절풍) 기후에서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특징이다. 새마을운동은 두레, 향약 같은 전통적인 마을 협동의식을 존중하고 권장하고 활용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사업 단위를 협동의 관행이 있는 마을 단위로 정했다는 점이다. 면이나 리·동 등 대규모 행정구역 단위로 했다면 협동의식을 기대하기 힘들었을 거다. 새마을운동은 오히려 전통의 협동문화를 활용했다. 마을과 마을 간에 경쟁과 협력이 있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이뤄진 것 중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교량이 많았다. 한 걸음 나아가서 더 넓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마을 간의 협동사업으로 확대됐다. 그런 형태를 당시 협동권 새마을 사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지식 - 재건국민운동



1961년 6월부터 정부가 벌인 국민의식 개혁운동. 협동과 단결, 자조와 자립을 강조했다. 5·16 직후 등장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설치됐고, 행정구역마다 지부가 만들어졌다. 관 주도의 운동으로 국민의 호응이 적었고 64년 8월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문을 닫았다. 민간 주도로 재건국민운동을 계속할 목적으로 그해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설립됐다. 역시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고 운동은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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