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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잘 지내요

중앙일보 2013.04.11 00:53 종합 32면 지면보기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2004년 6월, 남자친구가 e메일로 이별을 통보했다. “다른 여자들을 만난 지 몇 달째다. 그녀들을 만나지 않고 당신만 만나긴 어렵다”는 둥, 구구한 긴 글을 “잘 지내요(Prenez soin de vous)”라는 상투적 인사말로 맺었다. 이걸 받은 프랑스 미술가 소피 칼(60)은 아연했다. “ 저는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마치 저한테 쓰인 게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여자친구들에게 이 글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시작된 작업은 2개의 손가락 인형과 앵무새 한 마리를 포함한 107명 여성들의 해석으로 확대됐다. 큐레이터부터 외교관·헤드헌터·범죄학자까지 다양한 직군의 여성들이 여기 달라붙었다. “분석하고, 비평하고, 그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하라고. 해부해달라고, 소모해달라고 말이죠. 저 대신 e메일을 이해해달라고 했습니다. 저 대신에 대답을 해달라고요. 그것은 헤어짐의 시간을 늘리는 저만의 방법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돌보는 방법이었죠”라고 작가는 술회했다.



소피 칼, 잘 지내요-동화 작가편. 이별 편지를 읽는 동화 작가(위 사진)와 그가 쓴 동화(아래 설치).
 그리하여 그래픽 디자이너는 찬찬히 편지를 읽은 뒤 그걸 접어 날려버렸으며, 문답 화법에 능한 탈무드 전문가는 ‘비겁한 건가, 숭고한 건가’ 질문을 던졌다. 리베라시옹지의 편집자는 이 편지를 토대로 자기 신문 1면 더미판을 만들었고, 동화 작가는 어른들의 정서 불안에 대한 동화를 썼다. 소피 칼은 해석자 각각의 직업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사진 한 장과 그의 해석의 결과물을 짝지어 전시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e메일 작별 통보를 107명의 ‘군무’로 위트 있게 승화시켰다. 자유로워 보이는 제작 방식과 달리 그 결과물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 작가는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전시장의 벽, 뭘 할 때 그게 예술 작품이 될 만한지부터 고민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사건, 관람객들은 전시된 107개의 직군 중 자기 것을 대입해 보고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했을 거다.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 화제의 전시 ‘잘 지내요’다. 작가는 “이별은 내 인생에서 부정적인 모멘트였지만, 결과적으로 난 작업을 얻게 됐다. 치유의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기 삶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는 게 소피 칼의 특기다. 그 과정에 주변 사람들부터 낯선 사람들까지 적극 개입시킴으로써 작가는 삶을 한발 떨어져 보게 된다. 그의 한국 첫 개인전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가 20일까지 서울 도산대로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열린다. ‘잘 지내요’ 시리즈도 7점 걸렸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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