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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남자 나라의 여자

중앙일보 2013.04.11 00:47 종합 34면 지면보기
고정애
논설위원
지인 K의 얘기다. 정치권에서 보낸 몇 년,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심리 상태는 영 말이 아니었다. 무기력했고 의기소침했다. 게다가 동성(同性)인 여자들과의 만남을 꺼리게 됐다. 하이 C까지 내닫는 깔깔거림, 일상을 화제 삼아 이어지는 말과 맞장구들이 불편했다. 여학교를 나왔으니 한때 익숙했던 대화법이었을 텐데도 그랬다.



 주변에서 “까칠하다”는 선을 넘어 “이상하다”는 평판까지 돌았지만 K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평소에 함께 일해야 했던 건 남자들, 그중에서도 정치권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내야 했다. 그러다 개의할 일이란 걸 알게 됐다. 남녀가 함께한 자리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K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여자 동석자란 존재로 인해서였다. K는 고민에 빠졌고 결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긴 설문, 그에 못지않게 긴 상담 끝에 내려진 진단은 이랬다. “긴장 상태의 지나친 지속, 남성 위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과도한 여성성 억압….”



 여자가 아닌 남자가 됐다는 말인가. K는 “내가 여자지, 그럼 남자야?”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그러던 중 1차 깨달음이 왔다고 했다. “운동을 시작했는데 웬만한 남자만큼 하겠다고 버둥대고 있더라고, 내가. 스스로 남자로 헷갈렸던 거지.” 곧 2차 깨달음도 있었다. 최초의 여성 총리 지명자인 장상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를 보면서였다. “내 주변 남자들은 결코 장 후보자처럼 말하지 않아. 도덕성 하자 때문에 낙마했다곤 하지만 장 후보자의 여성적 화법의 문제도 컸지. 남자들이라면 질색할 스타일이지. 그런데 그렇게 느끼는 건 그나마 여자들뿐이더라고. 그러니 내가 남자겠냐, 여자 맞지.”



 묘한 논법이었지만 수긍은 갔다. 장 후보자는 당시 재산과 관련해 “시어머니가 한 일이라서 잘 모른다”고 했다. 남자라면 “제 부덕의 소치”라며 고개부터 숙였을 거다. 사실을 진술하면 통할 거라고 믿는 건 여자들이다. 장 후보자가 “여기서 용감하게 말하는 건 실례”라고도 했는데 남자라면 그런 용기를 내지도, 그런 실례도 안 한다. 『남자』의 기술이 맞는다면 남자들이 스포츠 경기하듯 공격했는데 장 후보자가 “나를 미워하거나 해를 끼치려거나 원래 악한이니 공격했다”고 믿고 강력한 반격에 나선 꼴이었다. 남자들의 사고론 장 후보자가 잘못한 거였다.



 K가 남자가 돼야 했듯, 장 후보자가 낙마해야 했듯, 정치는 진정 ‘남자의 나라’다. ‘마초의 나라’라고까지 하는 이도 있다. 거기에 입장하려는 여자는 이질적 세계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더욱이 룰이 공평하지도 않다. 엄격할 뿐만 아니라 대체로 가혹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여자들이 “감정과 생각을 분리할 줄 안다” “유능하다” “창의적이다”고 평가하는 여성 리더를 두고 남자들은 “매섭다” “기만적이다” “쉽게 영향받는다”고 판단한다지 않나(『여자는 어떻게 원하는 걸 얻는가』).



 최근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를 보며 다시금 절감했다. 남자라면 “많이 안 떨리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았을 거다. 남자라면 그렇다고 윤 후보자처럼 “제가 워낙 발표라든가 이런 걸 많이 해 조금 덜 떨린다”고 답하지도 않았을 거다. “모른다”는 답변을 저리도 웃으며 반복하고 유이(唯二)한 여성장관 후보자이니 ‘후보자’ 꼬리표를 떼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거다. 남자도, 여자도 안타까웠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시대 이후엔 남자들도 “여성 대통령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 특성이 여성적인 게 아닌데도 여성성에 대해 고민한다니 재미있다. 지금까지 적응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덤으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챘을 수 있겠다. K는 내 얘기다. 정도 차는 있겠지만 모든 여자의 얘기기도 하다. 하지만 후배들의 얘기는 아니게 되길 바란다.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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