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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변방 장수가 전쟁 영웅으로 … 궁예 이어 2인자

중앙선데이 2013.03.30 23:21 316호 26면 지면보기
나주에 출정한 왕건이 샘터에서 빨래하던 장화왕후에게 물을 얻어 마시는 장면을 형상화한 나주시 송월동의 조형물. 나주=프리랜서 오종찬
927년의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향방을 가른 육전(陸戰)의 대표적 전투라면, 나주전투는 당시 해전(海戰)의 대표였다. 903년부터 935년까지 왕건은 나주를 놓고 견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한 지역을 두고 이렇게 긴 공방을 벌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주는 후삼국 전쟁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고려 건국 이전 왕건의 행적을 기록한 『고려사』 가운데 ‘태조 총서’의 대부분은 나주전투로 장식돼 있다. 하이라이트는 왕건이 고려국을 건국하기 8년 전인 910년의 전투다. ‘태조 총서’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② 나주 전투

“(왕건의 군사가) 나주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벌려 놓았다. 목포에서 덕진포(德眞浦: 지금의 영암 해안)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의 앞뒤 좌우로 배치된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자, 왕건은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마음을 합하는 데 있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자, 적의 군함이 뒤로 물러났다. 이때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자(乘風縱火),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500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자, 견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 (생략) 견훤의 정예군을 꺾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에 삼한의 땅을 궁예가 태반이나 차지하였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000명으로 903년에 빼앗긴 나주를 탈환하기 위해 10여 일간 포위한다. 견훤의 반격을 당한 궁예는 왕건에게 정주(貞州: 개성 풍덕)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2500명 군사로 공격하게 한다. 왕건은 먼저 배후인 진도와 고이도(皐夷島: 신안 高耳島)를 공격해 나주를 고립시킨 후, 견훤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다. 이게 위의 기록이다.
이어 왕건은 견훤의 잔당으로 해전에 능하여 ‘수달’로 불린 능창(能昌)을 사로잡아, 나주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910년에 시작된 전투는 2년 만인 912년에 끝났다.(『삼국사기』권 50 견훤 열전) 나주전투는 이같이 견훤과 궁예의 대리인이 자웅을 겨룬 전투로서, 승리를 거둔 궁예의 태봉국이 견훤의 후백제국을 압도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고려 개방정책을 잉태하다
이 전투의 지휘자 왕건은 단숨에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 그는 궁예 휘하의 변방 장수에 불과했다. 나주전투 승리 당시 왕건은 36세였다. 왕건보다 10년 위인 견훤(867∼936년)은 26세 때인 892년 이미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후백제의 군주를 자처했다. 더욱이 나주전투 때 견훤은 후백제 군주였다. 왕건은 당시까지만 해도 견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미약한 존재였다. 왕건은 27세 때인 903년(궁예 재위 3년) 수군을 이끌고 금성군(錦城郡)을 정벌하고 주변의 10여 군현을 빼앗은 뒤 금성을 지금의 이름인 나주로 바꿨다. 견훤과의 첫 전투였다. 견훤이 다시 나주를 장악하자, 910년 궁예는 왕건을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견훤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승리한다. 변방의 장수 왕건은 이를 계기로 태봉국의 2인자인 시중으로 승진하고, 마침내 궁예를 몰아낸 뒤 고려국을 건설한다. 반면에 후백제의 견훤은 근거지 나주를 점령당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앞서 뒷문 단속부터 해야 했다. 근거지 나주의 상실은 견훤의 천하통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후삼국 최대 해전 나주전투의 실리는 결국 전투의 종결자 왕건의 몫이 되었다. 나주는 견훤에겐 기억하기조차 싫은 곳이지만, 왕건에겐 천하대권을 꿈꾸게 한 꿈의 무대가 되었다. 뒷날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 선택한 첫 망명지가 나주란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대체 나주는 어떤 가치를 지닌 곳일까?

1 신안선 모형도. 2 보존 처리 중인 신안선 구조물.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7일간 기도 끝에 불어 온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해 유비의 촉나라를 건국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2000년에 방영된 TV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드라마 작가는 왕건의 군사가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질렀다(乘風縱火)’는 ‘태조 총서’의 기록에 착안해 왕건의 책사 태평(泰評)이란 자가 동남풍을 이용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극화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통속 드라마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물론 왕건이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숨은 공신이 있다.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 원나라 선적의 ‘신안선’이 발굴되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자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발굴이 시작된 고려 선박 ‘마도선’까지 중국과 고려 선박 16척이 산동반도와 한반도 서해안에서 출토, 발굴됐다. 특히 2005년 중국 산동성 봉래시에서 발굴된 2척의 선박은 고려의 원양 항해용 선박이다. 고려 당시 서해안 일대에 성행했던 해상교류의 모습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다. 고려는 어느 왕조보다 해상교류가 활발했던 왕조다. 당시 해상교류는 황해(서해)를 중심으로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축으로 이뤄졌는데, 어떤 학자는 황해를 ‘동아시아 지중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주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 해상물류의 거점지역이자,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나주전투는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해상의 경제 전쟁이었다. 세 영웅이 사활을 건 것은 이 때문이다.

완사천. 프리랜서 오종찬
바다상인(海商)의 후예, 왕건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개성에 근거를 두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바다상인(海商) 출신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을 알아야 왕건이 승리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조상들이 바다상인으로서 축적한 자본과 인맥이 전투의 승리, 나아가 고려 건국의 밑천이 됐다. 왕건의 집안과 해상 교역을 통해 오랫동안 유대를 맺어온 서해안 일대 해상세력은 왕건이 나주로 출정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즉 같은 해상세력이라는 친연성이 왕건의 군사와 연대감을 갖게 했던 것이다. 왕건은 그들의 협조를 얻어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왕건은 각 지역의 유력한 세력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고, 그들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아 전쟁을 치러 나갔다. 그러다 보니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 뒷날 분란을 염려해 그는 부인의 서열을 매겨, 제1비에서 6비까지가 낳은 소생자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했다. 제1비는 정주(貞州: 지금의 개풍군) 출신의 신혜(神惠)왕후이며, 제2비는 나주 출신의 장화(莊和)왕후다. 1비 사이에 소생이 없어, 2비 소생인 혜종이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정도로 부인의 서열은 매우 중요하다. 주목되는 것은 서열이 가장 높은 두 부인이 모두 서남해 해상세력의 딸로서, 나주전투를 전후해 왕건과 혼인했다는 사실이다.

첫째 부인의 아버지는 정주 출신의 유천궁(柳天弓)이다. 정주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이 합류하고, 강화도를 마주하는 황해 중부 해상 교역로의 중심지다. 왕건의 근거지 개경과 인접해 있다. 유천궁은 이곳을 근거지로 한 해상세력이다. 왕건은 909년과 914년 각각 2500명과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에서 출발하여 나주로 향한다. 914년 70여 척의 군함을 이곳에서 수리한다. 당시 정주는 왕건이 거느린 해군의 발진기지였다. 유천궁은 왕건의 군사에게 식량을 제공할 정도로 왕건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왕건이 궁예를 섬겨 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고목 밑에서 말을 휴식시키는데, 왕후가 길가 냇가에 있었다. 왕건은 그녀가 덕을 갖춘 모습을 보고, 이 집에 유숙했다. 천궁은 자기 집에서 모든 군사를 풍족하게 먹이고, 딸에게 태조를 모시게 했다. 왕건은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신혜왕후 열전’).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 신혜왕후는 머뭇거리는 왕건에게 갑옷을 입히고 궁예를 몰아내게 한 내조의 여인이다. 한편 제2비(장화왕후)는 서남해의 거점지역인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吳多憐)의 딸이다.
“왕후는 일찍이 (나주)포구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얼마 후 왕건이 수군장군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배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시냇가 위에 오색구름의 기운이 있어 그곳으로 가 보았다.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그녀를 불러 잠자리를 함께했다. 뒤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혜종이다”(『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장화왕후 열전’).
꿈속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장화왕후가 뒤에 왕건과 결합한 사실은 곧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과 왕건이 연맹을 맺은 사실을 상징한다. 이같이 해상세력의 딸들이 왕건의 부인으로 가장 높은 서열의 제 1비와 2비가 된 계기는 나주전투였다. 나주전투 승리는 왕건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은 서남해 해상세력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들은 나주전투의 또 다른 숨은 공로자였다.

조선 최고 상인 宋商의 등장에 기여
이외에도 혜성군(慧城郡: 지금의 당진) 출신의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도 해상세력 출신이다. 복지겸은 궁예가 횡포하여 민심을 잃자, 배현경·신숭겸·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 고려를 세운 공신이다. 박술희는 936년 후백제 신검군과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943년 왕건이 죽을 때, 그에게 군국대사를 맡기고 훈요십조를 전했다. 그는 왕건의 최측근이자 뒤이어 즉위한 왕건의 맏이 혜종의 후견인이다.

고려왕조는 어느 왕조보다 대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상업과 해상무역을 통해 길러진 바다상인 특유의 개방성을 지닌 왕건 집안의 내력에다, 나주전투를 비롯한 왕건의 정벌사업에 협조했던 해상세력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상업과 무역의 장려, 적극적인 선진문물의 수용 등 고려 개방정책의 전통이 남아 있던 개성에서 뒷날 조선 최고의 상인집단인 송상(松商)이 등장한다.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왕건은 나주전투를 통해 천하 평정의 꿈을 잉태할 수 있었고, 해상세력의 협조를 얻으면서 개방정책이라는 천하 경영의 싹을 심을 수 있었다.



박종기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역사와 현실의 일체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역사학 수립에 노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고려의 부곡인, <경계인>으로 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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