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음악 읽기] 내 인생의 음악 (4)
생각해 보니 이 지면에 ‘내 인생의 음악’ 목록을 만들어 보는 중이다. 곡은 멀미 나게 많다. 라디오 선국을 할 때 다이얼이 돌아가는 사이의 잡음처럼 지직 지직 머리가 혼란스럽다. 사람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다. 좋아해서 찾아 듣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듣다 보니 좋아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내 인생의 음악이란 바로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아닐까.
과거 음악잡지에 왕성하게 기고할 때 ‘최상의 연주’ ‘베스트 음반’을 선정해 달라는 주문에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 건 없다. 손열음보다 아르헤리치의 피아노가 훨씬 뛰어난 연주인가. 더 유명할 수는 있겠지만 더 낫다는 평가는 자의적이다. 지금 손열음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그것이 최상이자 인생의 음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알 것 같다. 시골의 고모, 이모, 당숙들이 어째서 일생 남일해, 오기택이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왜 끝까지 고복수, 황금심이었는지. 변화를 호흡할 수 있는 유전자 수명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가령 오십 살이 넘으면 그 이전까지의 문화만 답습하게 된다든지. 기악 연주자보다 성악가에게 그런 집착이 훨씬 강력한 것은 목소리가 주는 친밀도와 정확한 이해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장인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요즘 청소년들은 모른다. 과거에 ‘물건’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공들여 만들어졌는지. 50년, 100년 넘은 내 커피 도구들에 얼마나 깊은 숨결이 배어 있는지. 마찬가지로 LP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모른다. LP 시대 초창기, 그중에서도 50·60년대에 제작된 음반들에 얼마나 황홀한 작품성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목소리들이 얼마나 심원한 깊이와 품격을 선사하는지.

해설 책자 사진 속의 ‘당대 최고’들은 이제 죄다 죽었다. 칼라스도 모나코도, 책표지 인물 테발디도. 포털 검색어에 오르는 연예인 이름을 대부분 내가 모르듯이 요즘 청소년들이 전혀 모를 저 먼 ‘당대’ 성악가들 얼굴이 참 아련하게 다가온다. 첫 얼굴인 빅토리아 데 로스앙헬레스의 표정은 그때도 역시 떫어 보이고, 그 다음 에토레 바스티아니니는 젊고 씩씩한 모습이다.
정력가 월터 베리나 조지 런던, 니콜라이 갸우로프 등도 한창 때 표정이고, 오로지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리자 델라 카자는 약간 살이 쪄 있다. 청년 프랑코 코렐리는 섹시하고 피셔 디스카우는 4살, 25살 때의 사진을 함께 싣고 있다(디스카우는 살아 있다!).
이 음반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 시절 무수히 쏟아져 나온 모음집 가운데 하나일 텐데 그런 ‘과거’를 되살려 살고 있는 현재의 나는 누구인지가 아리무삼한 것이다. 죽은 친구가 좋아하던 음반을 여전히 틀고 죽은 매형이 남겨놓은 외투를 여전히 입고 스스로 죽어버린 대통령을 여전히 사랑한다. 이런 고집불통 인간형을 세상은 노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내 인생의 음악이란 곧 노인의 음악이다. 지금 쌩쌩하게 젊은 친구들이여 노인의 음악을 듣지 말라. 노인의 관점도 인생관도 가치판단도 존중해 줄 필요 없다. 피차 섞이기가 불가능하니까. 가짜 선지자 같은 이른바 힐링 전문가들이 판치는 세상에 합세하기 싫다. 나는 이 퇴행의 시대를 거절하기 위해 노인의 삶을 택하련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