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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간 축구선수, 영어 간판 못 읽어…'망신'

중앙선데이 2013.03.31 00:01
#미국 사례=올림픽 트랙을 밟는 게 꿈인 미국 육상선수 조이 휴스(22)는 지난해 런던 올림픽 출전 기회를 간발의 차로 놓쳤다. 자신의 대표 종목인 400m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8명을 뽑는데 그만 결승선을 9위로 밟았기 때문이다. 나이 때문에 다음 올림픽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어 초조하다.


학업은 인생 보험…선수 은퇴 이후 '플랜 B'도 준비
운동과 공부, 두 마리 토끼 잡는 미 남가주대(USC)

하지만 선수생활을 접어도 걱정은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대(USC)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그는 ‘인생 플랜B’로 심리상담사가 될 준비도 하고 있다. 공부와 훈련을 병행할 수 있게 지원하는 USC의 ‘학생 선수를 위한 학업 지원(SAAS)’ 프로그램 덕이다.



3월 25일 USC 캠퍼스에서 만난 휴스는 SAAS 담당자 맥지 엘 샤하위 박사로부터 “지난주 역사학 강의 리포트가 부실했다는 담당 교수의 지적이 있으니 보충해 보자. 이번 여름학기엔 외국어 강의를 들어야 졸업요건이 충족된다”는 내용으로 1:1 멘토링을 받는 중이었다.

 

USC의 맥지 엘 샤하위 박사(왼쪽)가 학생 선수인 조이 휴스와 면담하고 있다. 엘 샤하위 박사가 들고 있는 서류는 휴스가 지금까지 수강한 강의 리스트와 평가 내용을 기록한 문서다. [사진=전수진 기자]


#한국 사례=이중재(38) 변호사의 대학시절은 암울했다. 고교 시절 나름 알려진 축구선수였던 그는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어차피 프로 선수가 된다는 생각에 학과는 ‘별 생각 없이’ 택했다.



하지만 1학년 2학기, 훈련 중 발목에 치명적 부상이 발생하면서 날개는 꺾였다. 운동 포기 뒤 대학 생활은 공포로 변했다. 강의 진도를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영어 간판을 못 읽어 미팅 장소를 찾지 못하기도 했다.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결국 2학년 때 자퇴해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막막한 심정으로 진로를 모색하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자 법에 흥미가 생겼고 내친김에 사법시험에 도전해 3전4기 끝에 합격했다.

 

“공부 덕에 진로 보장되니 맘놓고 운동”



‘학생 선수는 공부를 안 하고 일반학생은 운동을 안 한다’.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지 못하고 양자택일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병이다. 운동 외길을 가는 학생 선수들에게 중도 탈락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과 같다. ‘운포자(운동포기자)’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프로의 문은 좁다. 한국체육과학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학생 선수 중 약 10%만 프로로 진출한다. 그중 태극마크를 달 수 있는 국가대표의 문은 바늘구멍 수준이다. 국가대표가 돼도 은퇴 후가 문제다. 한선교(새누리당) 의원은 2011년 대한체육회·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분석해 “국가대표 선수 중 35.4%가 은퇴 후 생활고에 시달린다”고 발표했다. 국가대표 은퇴 선수들이 이렇다면 일반 선수들은 더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이중재 변호사는 “제2의 길을 찾은 나는 운이 좋은 소수에 속한다”며 “대다수 선수는 중도 탈락이나 은퇴 후 막막한 현실에 좌절한다. 운동선수들이 은퇴 후를 고민하지않아도 되는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에 미국 USC의 휴스 선수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학업에 소홀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결석이 잦거나 리포트가 부실하면 벌로 육상 훈련에서 제외된다. 그는 “한때 공부 때문에 운동을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반대다. 공부 덕에 진로가 보장되니 마음 놓고 운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USC의 SAAS 프로그램은 이 변호사가 얘기한 ‘시스템’의 롤 모델인 셈이다.

 

USC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스포츠 명문학교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부터 지난해 런던 올림픽까지 USC 선수들이 거둬들인 메달은 금 135개, 은 87개, 동 65개다. 미국 대학 중 메달을 최다 획득해 엘리트 선수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런던 올림픽 여자육상 3관왕 앨리슨 펠릭스는 USC에서 초등교육을 전공했고 서울 올림픽 수영 3관왕 재닛 에번스는 통신공학과 졸업생이다.



그런 USC가 학생 선수에게 중시하는 건 메달 숫자가 아니다. SAAS를 통한 ‘공부하는 선수의 육성’이다. 엘 샤하위 박사는 “학위는 인생을 위한 보험”이라며 “입학 당시 학생 선수들의 머리는 NBA나 메이저리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프로 진출의 꿈을 이룬다 해도 은퇴 후를 생각한다면 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 안전장치”라고 설명한다.

 

제도적 장치도 탄탄하다. 미국대학체육협회(NCAA)의 규정보다 기준을 강화했다. NCAA는 모든 학생 선수가 ▶매학기 6학점 이상 취득해야 경기 출전 자격을 주고 ▶학점이 2.0(만점은 4.0) 이상이 돼야 졸업할 수 있게 했다. USC는 이를 더 강화하고 처벌을 세분화했다. 이수 학점이 모자라거나 출결 상황이 불량하면 훈련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B학점 이상을 유지해야 소속 팀에 있을 수 있게 했다. USC의 학생 선수 650명 자료를 컴퓨터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전문 교수진이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SAAS 시스템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공부하지 않으면 운동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원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다. SAAS 담당 전문가들이 18명, 학생 자원봉사자들이 80여 명 있다. 담당 전문가들은 박사 혹은 운동선수 출신으로 뽑아 맞춤형 조언을 해준다. 전문가들도 전체 틀을 잡아주는 감독 격인 ‘아카데믹 카운셀러’, 각 분야를 지도하는 실무 격인 ‘러닝 스페셜리스트’로 나뉘어 세분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노트 필기법부터 학사 일정 관리, 시험 준비 방법 등을 상세히 알려주는 프로그램과 함께 학생별 맞춤형 지도도 실시한다. 일반 학생 중 해당 강의에서 우수한 학점을 받은 학생들을 연결해 개인 과외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평균 학점 2.89-런던 올림픽서 메달 25개



USC가 학생 선수 전용으로 770억원을 들여 지난 해 완공한 존 매케이 센터. 위쪽부터 센터 전경과 1층의 대형 멀티미디어 스크린, 지하 1층의 미식축구경기장. [사진=USC]
지난해 8월엔 770억원을 들여 학생 선수들을 위한 첨단 시설인 존 매케이 센터를 완공했다. USC 미식 축구팀 감독을 15년간 맡은 존매케이의 이름을 딴 센터는 철저히 학생 선수들을 위한 공간이다. 입구엔 ‘학생 선수와 코치·담당자가 아닌 경우 사전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존 매케이 센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1층의 스티븐스 학습센터다. SAAS 담당 교수진들이 상주하는 1:1 상담실과 도서관·컴퓨터실 등이 있다. 학생 선수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실내 미식축구경기장·체력단련실·휴게실 등 다양한 시설도 있다. 공부와 운동을 모두 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 시스템이다.

 

당근과 채찍을 두루 갖춘 USC의 시스템은 가시적 성과로 이어진다. 올해 학생 선수 전원의 평균 학점은 2.89로 20년 만에 최고였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선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모두 25개의 메달을 획득해 미국 대학 중 최고 성적을 올렸다. 공부와 운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SAAS 프로그램을 16년간 담당해 온 미미 버틀러는 “많은 선수가 운동을 그만뒀지만 전공을 살려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며 “미식축구 쿼터백 출신이지만 운동을 그만두고 유명 투자회사인 웨스턴 애셋 임원으로 일하는 졸업생 마이크 반 라포스트와 같은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도 지난 1월 27일 ‘학교체육진흥법’을 시행하면서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조치에 시동을 걸었다. 골자는 ▶학교장 은 학생 선수가 일정 수준의 학력(최저학력)에 미달하면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고 ▶학교 운동부 지도자가 학생 선수의 학습권을 박탈하면 학교운영위원회에 계약을 해지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강제조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과 함께 선수들과 학부모, 일선 학교에선 ‘강제 학습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래저래 한국에서 ‘공부하는 운동선수’는 요원한 목표로 남아 있다.



로스앤젤레스(미국)=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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