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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체스판 넣은 문양, 그 오묘한 사연

중앙선데이 2013.03.22 23:49 315호 23면 지면보기
엷은 노란색 포도 송이와 이를 감싸고 있는 크고 작은 포도 잎들. 위에는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이름 걸기치 힐스(Grgich Hills: 보통 처음에는 그르기쉬 힐스라고 발음한다)란 글자가 새겨 있고 그 아래에는 나파와 만들어진 포도 품종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하단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모양, 말과 체스무늬다.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11> 걸기치 힐스(GRGICH HILLS)

이 화이트 와인의 레이블 유래는 1976년으로 올라간다. 당시만 해도 미국 나파 와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 존재를 유럽에 알린 이는 파리에서 고급 와인 가게를 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였다. 그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블라인드 시음이라는 재미있는 행사를 기획했다. 스티븐은 미국 시음 와인을 모두 직접 골랐는데 그중 하나가 나파 샤토 몬텔레나의 샤르도네 품종의 화이트 와인 1973년 빈티지였다. 이 화이트 와인은 프랑스의 기라성 같은 버건디의 화이트 와인들(1973 Meursault-Charmes, 1973 Beaune Clos des Mouches, 1972 Puligny-Montrachet Les Pucelles)을 제치고 프랑스 심사위원들로부터 최고 점수를 얻었고 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미국 신문들은 ‘파리의 심판’이라는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이 시음행사에서 몬텔레나 화이트 와인을 만든 주인공이 바로 마이크 걸기치(Miljenco Mike Grgich)였다.

공산국가인 크로아티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 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자유를 원했기에 조국을 떠나 나파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1958년 8월 생 헬레나에 도착한 마이크는 처음 수브랭 셀러에서 일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 그의 영원한 멘토가 된 천재 양조가 첼리체프(Tchelistcheff: BV빈야드의 양조가) 밑에서 9년 동안 일을 배운다. 그리고 다시 몬다비에서 2년 일한 후 몬텔레나에서 양조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만든 1973년산 몬텔레나 화이트 와인이 하루아침에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 후 걸기치는 와인 인생에서 영원한 파트너가 되고 있는 오스틴 힐스와 함께 걸기치 힐스(Grgich Hills) 와이너리를 설립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화이트 와인의 포도를 레이블로 사용하기 위해 예술가인 세바스티안 티튜스에게 레이블 제작을 의뢰했다. 하단 오른쪽에는 힐스 가문의 상징인 종마를, 왼쪽에는 고향 크로아티아 국기의 서양 장기판 모양을 넣어 의미를 더했다. 초창기 레드 와인에도 이 레이블을 사용했으나 나중에 보라색 포도로 색만 바꾸었다.

걸기치 와인은 전형적인 나파 스타일은 아니다. 향이 풍부하고 입감도 전체를 느낄 수 있는 힘이 느껴지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고 산도가 좋아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은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프랑스 화이트보다는 조금 무거운, 그러나 세련됨과 우아함을 잃지 않은 와인이라 생각한다.

오는 4월이면 90살이 되는 마이크 걸기치는 여전히 나파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현재 피아노를 전공한 딸이 와이너리를 계승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다.

와인은 어느 곳에서 만들어지던 인간의 맛을 만족시키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준다면 명성은 그 뒤를 자연스럽게 따른다. 마이크 걸기치는 와인을 통해 자유를 얻었고 와인을 통해 그의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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