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소희 명창 빼닮아 ‘소릿속 단단한’소리꾼

중앙선데이 2013.03.24 00:49 315호 13면 지면보기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널 보고 나를 봐라/내가 널 따라 살것냐/눈에 안 보이는 정 때문에/내가 널 따라 산다.”
 “효성 있는 내 딸 청이/남경장사 선인들게/삼백 석에 몸이 팔려/인당수 제수로 죽으러 간 지가 우금 삼년이오.”

파워 차세대 <23> 국립창극단 ‘서편제’ 주역 민은경


민은경씨는 “티켓이 매진되고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인기를 뮤지컬만 누리란 법은 없다”며 판소리 대중화에 대한 열망을 털어놨다. 최정동 기자
 작고 가녀린 체구에서 어찌 저리 허공에 쫙 뻗어 나가는 소리가 나올까 싶다. 옛날 어른들 말마따나 울림통이 남다른 걸까. 체구만 작은 게 아니라 얼굴도 앳되다.
 19일 오전 서울 남산 국립극장 연습실. 소녀 같은 외모와는 딴판인 힘 있고 구성진 가락의 주인공은 민은경(31)씨. 27일부터 31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창극 ‘서편제’의 어린 송화 역을 맡았다. 올해 국립창극단 신입단원으로 들어와 곧바로 주역을 따냈다. ‘서편제’는 ‘영웅’ ‘명성황후’를 만들어 창작뮤지컬의 대부로 불리는 윤호진씨가 연출하는 첫 창극인 데다 대본엔 김명화, 음악엔 양방언 등 이름난 창작자들이 총출동한 작품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
신입단원이지만 민씨는 나이배기다. 국립창극단이 10년 만에 신입을 뽑은 터라 활동 경력에 비해 입단이 늦어졌다. 동기 6명 중 나이가 가장 많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에서 인턴도 했고,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무대에 꾸준히 섰다. 퓨전 국악밴드를 만들어 소극장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중앙대 대학원 한국음악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또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다. 대중적으론 ‘억척가’의 이자람(34)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민씨 역시 차세대 소리꾼을 꼽을 때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아역이긴 하지만 신입을 주역으로 발탁한 이유에 대해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저 나이에 나오기 힘든 성숙한 음색”이라고 칭찬했다. 김 감독은 민씨를 중앙대 음악극과 시절부터 가르쳐 왔다. 국악평론가 윤중강씨도 “최근 1~2년 새 두드러지게 도약한 민씨의 서정적인 음색은 마치 고(故) 김소희 명창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하다”고 평했다.
 그가 판소리에 입문한 과정을 보면 여느 예능 영재의 그것과 흡사하다. ‘정트리오’의 어머니 이원숙씨나 피겨스타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씨처럼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부모가 있었고, 적절한 조기교육이 이뤄졌다. 물론 본인의 피나는 노력이 뒤따랐다.

위부터 안숙선·이소연·민은경. 나이대에 따라 창극 ‘서편제’의 송화 역을 맡는다. [사진 국립극장]
 민씨는 태어날 때 유난히 울음소리가 우렁찼고 노래를 잘하던 꼬마였다. 마흔 넘어 얻은 늦둥이 고명딸의 재능을 알아차린 건 평소 국악을 즐겨 듣던 사업가 아버지였다. 전남 목포에 살던 그는 시립국악원에 딸을 데려가 명창 안애란 문하에 맡겼다. 민씨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비보이 팝핀 현준의 아내이자 ‘판소리계의 이효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국립창극단 단원 박애리씨와는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초교 시절부터 목포에서 같이 수학했다.
 그때부터 스파르타식 훈련이 시작됐다. 또래들처럼 피아노나 주산 등 일반학원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국악원으로 곧장 가 판소리 수업을 받고 날이 어두워져서야 귀가했다. 선생님이 한 구절 먼저 부르면 한 구절 따라하는 구전(口傳)식 레슨이었다. 조금만 한눈팔면 “어디서 해찰을 부리느냐”며 스승의 부채가 날아와 손등을 후려쳤다. 아버지도 엄했고 스승도 엄했다. 둘 다 조금의 게으름도 허락하지 않았다.
 방학 때는 여행을 가거나 빈둥대는 대신 지리산에 들어갔다. 소리하는 사람들이 ‘산(山)공부’라고 부르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폭포 아래서 하루 9~10시간을 목이 터져라 연습했다. 오로지 연습, 연습, 또 연습이었다. 그래서 또래와 놀아 본 기억이 그에겐 거의 없다.
 신기한 건 꾀가 나거나 반항심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어린애가 판소리를 해?’하며 신기해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한테 우리 소리가 뭔지, 왜 좋은지 알려주고 실제로 들려주는 게 즐거웠죠.” 이따금 집과 연습실을 오가는 쳇바퀴 생활에 갑갑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은 연습이 탈출구였다. “회사원들이 스트레스 풀러 노래방 가듯 저는 산에 가서 소리를 내지르면 맺혔던 슬픔이나 속상한 마음이 다 풀렸어요.”
 지금도 며칠만 소리를 못하면 목이 근질근질하고 기침이 나온다니 천생 소리꾼은 다른 모양이다. 연습실에 갈 상황이 안 될 땐 밤에 집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연습을 한 적도 있다. 너무 연습을 많이 한 나머지 목소리가 갑자기 나오지 않는 황당한 경험을 한 적도 있다. 대학 시절 국립극장의 ‘차세대 명창’ 공연을 한 달 앞두고서다. ‘그 고비를 넘겨야 소리가 나온다’는 주변의 조언에 억지로 피를 토하듯 소리를 내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공연 당일 무대에 올랐는데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돌아왔다. “목소리가 곧 악기”이기 때문에 평소 오미자·도라지·배 등의 즙과 물을 많이 마신다.
 소리를 좀 더 본격적으로 배운 건 중학 3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다. 성우향 명창에게 강산제를 배우기 시작했다. 조선조 고종 시대 광대였던 박유전이 창시한 강산제는 가냘프고 여성스러운 서편제와 우직하고 남성적인 동편제를 섞은 소리다. 국악예고 시절 전공 공부는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재학 중 동아국악콩쿠르 학생부에서 금상을 받았고, 대학 땐 같은 콩쿠르 일반부에서 다시 금상을 탔다.
 이후 수상 경력은 화려하다. 임방울 국악제 판소리 부문 장원, 진도 민요 경창대회 최우수상, KBS 국악대경연 판소리 부문 장원, 국립극장 주최 한국가요제 은상 수상…. 그 뒤엔 겉으론 엄했지만 속내는 도시락을 늘 손수 챙겨 줄 정도로 살뜰했던 아버지의 응원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서편제’엔 궁극의 소리를 뽑아내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가 나온다. 그 역시 “‘서편제’ 연습을 하는 동안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대학 생활은 그에겐 또 다른 도전이었다. 소리에만 일로매진해 온 그에게 ‘판소리=종합예술’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 게 대학 공부였다. 연기·무용·악기 등의 과목 이수는 낯설고 벅찼다. 김성녀 예술감독이 당시 해 준 “아픔과 기쁨을 두루 경험해야 예술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그때의 충고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소년 김홍도 역(가운데)을 했던 39화선 김홍도39(2011).
 이런 노력과 교육이 더해진 덕에 민씨는 대학 졸업 이후 줄곧 국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6년엔 국립창극단의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에서 심청 역을 맡으며 첫 주연으로 신고식을 치렀고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2010)의 줄리엣과 ‘화선 김홍도’(2011)의 김홍도 역을 맡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그를 주목해 온 국악평론가 김문성씨는 “흔히 성대가 튼튼해 음을 잘 뽑아내는 소리꾼을 ‘소릿속이 단단하다’고들 하는데, 민은경씨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말한다.
 2010년엔 뮤지컬 ‘서편제’로 잠시 외출을 하기도 했다. 이자람·차지연과 함께 송화 역에 캐스팅돼 18회의 공연을 치렀다. 두 배우만큼 관심을 받지 못해 속이 상하긴 했지만 끝까지 해내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도전했던 값진 경험이었다.

퓨전 국악밴드 결성, 지하철 예술무대 공연
그가 장차 숙제로 꼽는 건 판소리의 대중화다. 자기 또래 관객들과 호흡하고 싶다는 바람이 크다. 퓨전 국악밴드를 만들어 음반을 내고 지하철 예술무대에서 공연을 계속해 온 것도 사람들이 어렵게만 여기는 판소리의 매력을 알려 주고 싶어서다. 요즘 유행어를 가미해 각색을 하거나 해설을 곁들이면 객석 반응이 확연히 달라지는 게 느껴진단다.
 “판소리를 골동품처럼 여기는 시각들이 많아요. 일제시대 전엔 사실 판소리가 대중음악이었는데 말이죠. 새롭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다시 그런 전성시대가 올 수 있지 않을까요. 티켓이 매진되고 배우들이 기립박수 받는 인기를 뮤지컬만 누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그는 선배이자 동료이자 라이벌 이자람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탁월한 기획력과 대본 쓰는 능력 등으로 시대에 맞는 소리를 늘 고민하는 점은 정말 배우고 싶어요.” 반면 국악평론가 김문성씨는 “대중화에 대한 강박 때문에 명창이 되기 위해 지금 단계에서 갖춰야 할 요소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전통 계승과 현대화 사이에서 균형을 갖춰 달라는 주문이다.
 김성녀 예술감독이 그에게 붙여 준 별명은 ‘수퍼 땅콩’. 작지만 워낙 다부진 면모 때문이다. 판소리밖에 모르고 살았지만 대학에 들어간 이후 한 번도 집에 손을 벌려 본 적이 없다. 입시 레슨과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고 학자금 대출도 갚았다. 삶의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판소리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태도다. “광대가 갖춰야 할 으뜸 조건은 ‘인물치레’라는 말이 있어요. 품성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거죠. ‘제 몸이 올바르게 서야 좋은 소리가 나온다’는 생각을 무대에 설 때마다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어요.”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