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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긴급조치 1·2·9호 위헌”

중앙일보 2013.03.22 01:00 종합 8면 지면보기
서울 시민들이 1974년 8월 23일 긴급조치 1, 4호 해제를 알리는 벽보판을 보고 있다. 영장 없이 인신 구속을 가능케 하는 긴급조치 1호는 그해 1월 발동됐다. [사진 중앙일보]


헌법재판소가 1970년대 유신 시절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내려진 이 조치가 당시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억압했다는 취지다.

헌재 “표현의 자유 등 국민 기본권 크게 침해”
피해자, 재심 쉬워지고 형사보상 청구도 가능



 헌재는 21일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해 발령한 긴급조치 1, 2, 9호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74년 정부시책을 비판했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종상(72)씨 등 긴급조치 피해자 6명이 낸 헌법소원에서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 2호에 대해 “입법 목적의 정당성이나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며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 및 신체의 자유,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해선 “정치적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다”고 밝혔다.



 헌재는 긴급조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유신헌법이 아니라 국민적 요구를 바탕으로 만든 87년 헌법으로 삼았다. 재판부는 “이미 폐기된 유신헌법에 따라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헌법 개정을 결단한 국민의 의사에 반한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위헌 여부를 심판하는 관할이 헌재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법률’의 위헌 여부는 헌법재판소가, 법률의 하위 규범인 ‘명령·규칙 또는 처분’ 등의 위헌 또는 위법 여부는 대법원이 심사 권한을 갖는다”며 “유신헌법 제53조에 근거한 긴급조치는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므로 위헌 여부 심사 권한은 헌재에 속한다”고 밝혔다. 앞서 대법원은 2010년 오씨의 재심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며 “긴급조치는 법령이 아니라 명령·규칙에 해당해 대법원이 위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며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직권으로 위헌 판단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대법원과 헌재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법원 판결은 해당 사건에만 효력을 미치지만 헌재 결정은 일반적인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재심 절차가 훨씬 단축된다. 형사보상 청구도 가능해졌다.



 위헌 결정은 오씨 등이 2010년 헌법소원을 낸 지 3년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2개월 넘게 헌재소장 공백 사태가 이어진 가운데 나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법원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사건에 대해 평가한 것”이라며 “안팎으로 위기를 맞은 헌재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정권 초기 의미 있는 판결을 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헌재 판결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발의한 ‘긴급조치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안’이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동현·김기환 기자



◆긴급조치= 1972년 제정한 제4공화국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이 국가위기 상황이라고 판단될 때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74년 법원의 영장 없이 인신 구속을 가능하게 하는 긴급조치 1호와 긴급조치 위반자를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는 긴급조치 2호를 발동했다. 75년에는 유사시 군 병력 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4년 넘게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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