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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도발도 진화한다

중앙일보 2013.03.22 00:31 종합 32면 지면보기
채인택
논설위원
20일 주요 방송사와 금융사가 사이버 공격을 당했다. 한국의 기간망이 이렇게 뚫렸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물밑에선 더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5년간 정부와 공공기관 대상의 사이버 공격이 7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 의원들에게 서면과 구두로 밝혔다. 국정원은 그 대부분을 북한 사이버전 전담 조직의 소행으로 추정한다.



 사이버 공격이 터지자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북한은 사이버 전쟁을 위해 해킹 인력을 10만 명이나 길렀으며 이 중 1000여 명이 대남공작을 맡은 정찰총국에서 쓰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반면 한국 정부에는 이를 막을 화이트 해커가 200여 명밖에 없으니 앞으로 전문인력 양성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30년 경력의 대북전문가를 만났다. 뜻밖의 지적이 나왔다. 그는 “북한이 사이버 전력 확보에 혈안이 돼 있다거나 해킹 인력을 몇만 명 양성했다는 것은 이미 10년 전부터 나왔던 ‘구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대비책을 사전에 마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설마설마하다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는 한국 정부의 고질적인 안보불감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기가 힘들다는 따끔한 지적이다.



 한 6·25 참전 노병을 만나 보니 더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이름이 나가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 노병은 기습남침을 당한 6·25전쟁은 물론 심지어 3년 전 온 나라를 비탄에 빠뜨린 천안함 사건에서도 우리 정부가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 두 달 뒤인 5월 24일 나온 대통령 담화는 “우리의 영토·영해·영공에서 다시 한번 도발하면 자위권을 발동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뒤인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지는 것을 막기는커녕 사건이 발발하자 우왕좌왕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우리 공군의 F-15 전투기가 원점을 타격했어야 하니 마니 말만 무성했다. 이는 북한이 도발할 경우 어떻게 조치할지에 대한 원칙과 세부 작전계획을 사전에 제대로 수립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이 노병은 비판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는커녕 도발을 당하고도 다음 도발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미리 자세한 계획을 세워 도발 때는 국민에게 ‘우리 정부와 군이 계획대로 잘 대처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국민은 안심할 수 없다.



 사이버 공격도 지난 4년 새 굵직한 것만 이번이 여섯 번째다. 북한 도발 위협이 상존하는 데다 정보기술(IT)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니만큼 대비책은 정부가 이미 오래전에 세워뒀어야 마땅하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허겁지겁 대책회의를 한다니 국민이 오히려 정부를 걱정할 지경이다.



 이번에 만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은 같은 도발을 단시간 안에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권의 태생적 성격상 빨치산 기만 전술을 선호해 다음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이버 공격이 북한 소행으로 확인된다고 해도 그저 해킹 대비책만 세우는 건 아마추어나 할 일이다. 사이버 공격은 물론 가능한 모든 상황에 종합적으로 대비하는 입체적인 도발 대비 작전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군은 전쟁이 터지면 맞서 싸우기만 하고, 정보 당국은 정보수집만 하고, 사이버 담당기관은 해킹만 막으면 된다는 관료적인 사고와 시스템으로는 이러한 빨치산식 도발에 맞서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국제화하고, 디지털화한 현대 안보 환경에선 도발도 진화한다. 여기에 맞서려면 더 빨리 진화하는 수밖에 없다. 군·정보기관·행정기관이 융합해 시너지를 내는 퓨전형 안보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 안전을 수없이 강조해왔다. 국민 안전의 핵심은 안보다. 안보는 낡은 시스템으로 확보할 수 없다. 혁신적인 도발 대비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



채 인 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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