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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박근혜와 김중수

중앙일보 2013.03.22 00:27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상렬
경제부문 차장
2003년 초 취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그중 하나가 인사보좌관의 신설이었다. 인사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자리에 기용된 정찬용 광주YMCA 사무총장은 일약 새 정권의 실세로 떠올랐다. “촌닭이 갑자기 불려왔다”는 그의 일성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세간의 관심은 김대중(DJ) 정부에서 임명된 인사들의 교체 여부였다. 그중 한 자리가 금융감독위원장이었다. 그해 8월 임기가 끝나는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임기를 채우는 첫 번째 위원장이 되고 싶어 했다. 신구(新舊) 정권의 뿌리가 같았기에 이 위원장이 임기를 마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핵심에서 의견이 갈렸다. 선거캠프 출신들은 “유임시키자”고 했다. 인사 쪽에 물었더니 “허허, 바꿔야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이 위원장은 임기를 5개월 앞두고 옷을 벗었다. 법에 규정된 금감위원장 임기는 사문화됐다. 금융감독을 정치권력에서 독립시키겠다는 애초의 취지는 퇴색됐다.



 그런데 한국은행 총재의 경우엔 달랐다. 노 대통령 취임 당시 한은 총재는 DJ가 임명한 박승이었다. 노 대통령은 3년을 기다렸다. 박승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후임으로 부산상고 선배인 이성태 부총재를 총재로 발탁했다. 이후 노 대통령이 퇴임하고 이명박(MB)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성태의 임기는 2년이 남아 있었다. 7% 성장을 기치로 내건 MB와 ‘인플레이션 파이터’인 이성태는 잘 맞지 않았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금리를 내리라는 MB 정부의 신호를 이성태는 좀처럼 따르지 않았다. MB 정부에선 “한은 총재가 문제”라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MB는 이성태를 바꾸지 않았다. 2년을 기다린 끝에 자신의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중수 OECD 대사를 한은 총재로 지명했다. 이제 MB는 떠났고, 김중수는 박근혜 대통령을 맞았다. 김 총재의 임기는 내년 3월 말까지다.



 미국의 경우 임기 보장 원칙은 철저하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말할 것도 없다. 12년 전 연방거래위원회(FTC)를 이끄는 5인의 위원 중 한 명인 실러 앤서니(당시 70세)를 만난 적이 있다. 때마침 우리나라에선 공정거래위원회의 독립성이 한창 이슈였다. 그에게 어떻게 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느냐고 묻자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통령이 나를 해고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나요.”



 취임 초 자기 사람을 중앙은행 총재에 앉히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는 대통령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그 유혹에 지는 순간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지켜온 중앙은행 독립성에 금이 가고 통화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달아난다는 것을 노 대통령이나 MB는 간파했던 것이 아닐까. 중앙은행을 중앙은행답게 하는 일, 이제 박 대통령의 차례가 됐다.



이 상 렬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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