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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미술 40년, 국가와 나를 묻다

중앙일보 2013.03.12 00:44 종합 24면 지면보기
방구석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울트라맨들. 빨간 울트라맨들이 그대로 일장기 모양을 이룬다. 군기(軍旗)에서 시작된 일장기도, 일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만세라는 행위도 군국주의적 냄새가 짙다. 다만, 이미 한 물 간 캐릭터인 울트라맨이 하는 짓이라는 게 문제다. 야나기 유키노리의 ‘만세·코너’(1991)다. 내셔널리즘의 취약성에 물음표를 던지는 1980~90년대 일본 미술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사진 서울대미술관]


#1. 미술관 들머리엔 물방울 무늬 빨간 조형물이, 건물 안 층계참 사이 허공엔 빨간 풍선이 두둥실 설치됐다. 각각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84)의 ‘새로운 이정표’와 ‘물방울 강박’이다. 손님 끌기에 맞춤한 이 발랄한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두 번째로 나이 많은 원로의 것이다. 정신병동에서 지내며 지금도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이 노작가는 엄습해 오는 환각을 작품으로 펼쳐 놓았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던 것들 맘껏 발산해 ‘인간이란, 정상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고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서울대미술관 ‘리 퀘스트’전



 #2. 전시장 코너엔 수백 개의 울트라맨이 원을 그리고 서서 중심을 향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손바닥만한 빨간 울트라맨들은 거울에 반사되며 그대로 일장기를 이룬다. 야나기 유키노리(柳幸典·54)의 ‘만세·코너’다. 이 군국주의적 형상의 주인공이 울트라맨이라는 게 역설의 포인트. 딱 3분간만 활동할 수 있는 영웅 캐릭터이며, 경제성장과 더불어 인기가 더해져 대량으로 소비된 후 서서히 잊혀진 전후의 ‘국민영웅’이다. 그러니 울트라맨은 어쩌면, 지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벌을 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 신림동 서울대미술관이 일본국제교류기금과 공동 진행하는 ‘Re: Quest(리 퀘스트)-1970년대 이후의 일본 현대미술’전이다.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51), 나라 요시토모(奈良美智·54),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65), 아이다 마코토(?田誠·48) 등 일본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53명의 112점을 모았다. 개별작가·인기작가 위주로 소개돼해 온 일본 현대미술을 통시적으로 조명하는 본격 기획전이다. 이웃 나라의 지난 40년을 미술이라는 필터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네덜란드 건축가 렘 쿨하스의 야심 찬 설계로 큐레이터들에게는 도전적 공간이었던 이 미술관 건물 전체를 구석구석 활용한 전시다.



 70년대 일본에서 ‘반근대’를 주창한 ‘모노하’ 작가들의 운동에 이어, 80년대의 모더니즘, 90년대 이후 하위문화의 영향이 짙은 ‘재패니즈 팝’이 일본 미술의 주류로 떠올랐다. 그 흐름 속엔 유일하게 한국 작가로 이우환이 참가했다.



위의 작품에서 일장기를 이룬 군상들은 전부 이렇게 생겼다. 1979년 시작한 TV 시리즈 속 변신 영웅, 울트라맨이다.
 대표 기획자인 마쓰모토 도오루(松本透)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부관장은 “이 전시는 일본의 동시대 미술의 향방을 모색하는데 있어 실로 오랜만에 주어진 기회”라고 말했다. 이우환이 포함된 데 대해서는 “그가 일본 미술계에 미친 영향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고 했다. “왜 지금, 서울에서 일본현대미술 전시인가”라는 질문에 미술관 오진이 학예사는 “1854년 개항, 1868년의 메이지 유신 등으로 일본은 발 빠르게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고, 한국 근·현대미술은 이를 통해 미술·서양화라는 제도를 수입한 동시에 이를 뛰어넘고자 분투했다”고 대답했다.



 일본은 서구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끊임없이 자기화하려 했지만, 이같은 번역·차용은 종종 오독·오해됐다. 모리무라 야스마사(森村泰昌·62)가 마네의 대표작 ‘피리부는 소년’ 모습으로 직접 분장하고 찍은 실물 크기 사진이 이같은 어색한 결합을 대놓고 보여준다. 야노베 겐지(48)의 실험복 차림 분신은 우주도 정복할 기세였던 70년대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뒤안길을 보여주지만, 동일본대지진 2주년을 맞은 지금은 방호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전시장에서 지극히 국제화된 일본 미술가들의 면면을 대하는 우리는 또한 “왜 우리에겐 이 같은 작가 프로모션이 어려운가”를 자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쓰모토 부관장의 말대로 근대미술의 역사는 그 지역의 숫자만큼 존재하니. 다음 달 14일까지. 입장료 성인 3000원, 7∼18세 2000원. 02-880-9504.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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