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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명품인생 감별법

중앙일보 2013.03.12 00:22 종합 32면 지면보기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한밤중에 불쑥 찾아가서 라면 하나 끓여 달라고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느냐’.



 어느 모임에서 누군가 물었다. 있다면 제대로 잘 살아온 인생이고, 없다면 허투루 산 인생이라는데. 생각해 보니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 다행이다. 적어도 허투루 살지는 않았으니.



 머릿속에 가만히 그 장면을 그려 보았다. 한밤중 연락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라면 있니?’란다. 그 친구의 갑작스러운 한밤중 방문이, 말 그대로 라면 먹을 곳이 없어서도, 배가 고파서도 아닐 것이고 잠이 안 와서, 심심해서도 아닐 게다. 이럴 때 ‘무언가 몹시 힘들고 외로운가 보다’ 하는 마음에, 말없이 라면을 끓여 대접하는 친구? 맞다. 그런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살아온 우리네 인생이 명품인생이며, 남은 인생길 또한 그리 고단하지 않으리라.



 갑작스러운 방문 이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젓가락질 사이사이 오가는 따스한 눈길만으로도 둘 사이에는 벌써 위로하고 위로받고 다 했을 테니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할당받은 자기 몫의 삶을 외롭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인가.



 만약 한밤중에 라면을 찾는 친구가 내게 찾아온다면, 라면 옆에 술 한 잔 살며시 곁들여 내놓으리라. 고단한 몸 쉬엄쉬엄 살라고.



 일주일 전. 그늘에는 쌓인 눈이 녹지도 않고 그대로인데, 살랑대는 바람 끝에는 흙냄새와 풀냄새 그리고 소똥냄새까지 뒤섞인 봄냄새가 둥둥 떠다니던 날이었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더니 그래서인가. 난 ‘봄앓이’를 심하게 하는 편이다.



 노랑·분홍·보라 빛깔의 꽃들을 보면 눈은 어질어질하고. 겨우내 웅크렸던 몸에 따사한 봄볕이 내리쬐면 온몸에는 힘이 쏘옥 빠지고.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마음은 싱숭생숭. 또랑또랑한 새소리에 가슴은 두근두근.



 조급한 마음에 봄을 찾아 마을 앞산에 올라갔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사는지도 궁금하고, 진달래 피는 곳에 정말 김소월님의 마음이 피어 있는지도 궁금하고.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살을 내민 꽃봉오리의 봄은 없었다. 남쪽에서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모양이다. 어디쯤 오고 계실까. 봄을 찾아 헤매다가 집에 돌아오니 목도 마르고 시원한 생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작년, 추수 끝날 무렵에 마을이장이랑 부녀회장이랑 서너 명이 양념치킨과 생맥주를 마셨던 일이 생각난다. 한참 연장자 되시는 어르신들과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대화도 주제도 없고. 농사일이라고는 상추 몇 포기 심어 본 것이 전부인 내가, 추수 얘기며 볍씨 얘기며 도무지 뭔 말들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하지만 그분들은 내가 꽤나 신선했었는지 마을회관 앞을 지날 때마다 ‘다시 뭉쳐 한 잔 어때요’ 하신다. 글쎄. 그리 즐거운 기억은 아니라서 좀 그렇고. 속을 털어놓을 만한 ‘라면 친구’도 부근엔 없고. 바로 그때. 궁한 대로 남편을 ‘라면 친구, 술 친구’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하고 술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남편이지만, 맛있는 음식과 함께하는 와인이나 좋은 기름에 잘 튀겨진 통닭과 함께하는 시원한 생맥주의 참맛을 알게 되면 달라질 거다. 하루 한 잔 술은 오히려 보약이라니 건강해져 좋고, 저녁마다 술잔 나누는 친구가 있으니 행복하고.



 그날 피로는 그날 풀어 버리라는 피로해소제 광고처럼, 피로해소제 역할을 할 술을 한 잔씩 식탁에 올리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술을 부르는 안주’가 저녁메뉴였다. 불고기를 바짝 구워 채소와 버무린 날엔 와인을 곁들이고, 삼겹살 편육을 한 날엔 막걸리를, 도루묵 구이에는 정종을. 일주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상을 마주했더니, 이제는 마치 대단한 술꾼 부부라도 된 듯하다. 한밤중에 불쑥 찾아가서 ‘라면 끓여 달라’ 할 친구가 없다고? 그렇다면 ‘궁한 대로’ 부인이나 남편이 대신하면 어떨까.



 시작은 ‘궁한 대로’였다 하더라도 나중엔 ‘탁월한 선택’이 될 거다. 한밤중에 친구 집까지 가지 않아 좋지, 속속들이 다 알아 편하지, 서로의 상처가 곪기 전에 빠른 치료가 가능하니 실용적이지.



 부부가 한 잔 술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



 ‘참 착한 인생’이다.



엄 을 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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