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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대통령 잘 모시는 법

중앙일보 2013.03.11 00:29 종합 32면 지면보기
정선구
경제부장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릴 때 VIP의 앞에 서야 할까, 뒤에 서야 할까. 얼핏 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상당히 헷갈린다. 정답은 이렇다. 올라갈 때는 VIP의 뒤에, 내려갈 때는 앞에. 왜 그럴까. 올라갈 때 VIP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보이면 실례가 되며, 내려갈 때 VIP의 정수리를 쳐다보지 않는 게 예법이다. 기자 초년병 시절 우연히 배운 의전 중 하나다.



 정부 관료 가운데 의전 하면 외무부 공무원이 으뜸일 듯싶지만 재무부 관리도 이에 못지않다. 경제기획원 A국장이 하와이로 출장 갔을 때다. 당시 하와이에는 재무부 B사무관이 연수 중이었다. 만약 기획원 출신이 그곳에 있었다면 공항 영접에만 그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B사무관, 보통 정성이 아니다. A국장 체류기간 동안의 모든 동선을 파악해 만전을 기한다. 그뿐이 아니다. 혹시 비가 내릴지도 모를 상황까지 가정해 뒀다. 훗날 A국장이 장관이 되자 B사무관은 승승장구한다.



 내친김에 의전 에피소드 하나 더.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뉴욕 출장 일정상 케네디 공항이 아닌 뉴어크 공항을 이용해야만 했다. 관계사 오너인 만큼 통상 대한항공 뉴욕지점에서 의전을 하는데, 뉴어크 공항에는 국내 항공사 사무실이 없다. 털털한 성격의 최 회장. “의전은 무슨…”이라며 다른 승객들과 함께 공항에 내리려 하는데 갑자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다시 기내로 들어가 주십시오.” 그러고는 “E Y CHOI”(최 회장 영문 이니셜)가 호명되며 먼저 내리라는 게 아닌가. 어리둥절한 채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최 회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진해운 뉴욕지점장. 호남 출신 그 지점장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나가(제가), 힘 좀 썼습죠.” 뉴욕에서는 항만청이 공항까지 관리하기 때문에 항만청과 교류가 있는 해운사 지점장의 민원이 가능했다고 한다. 최 회장은 “외국인 탑승객들이 나를 테러범인 양 쳐다보는 것 같았다”며 웃으면서 술회했다.



 새 정부가 초기부터 흔들리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측근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저 에스컬레이터에서 엉덩이를 안 보이고 정수리를 쳐다보지 않는 것만이 VIP 의전이랴. 거만함으로 뒤로 심하게 젖혀진 고개를 받쳐주고, 무모한 행동으로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앞에서 버텨주는 게 진정한 의전이다. 하와이 재무부 사무관처럼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플랜B를 제시하며, 때로는 한진해운 지점장 같은 기지를 발휘해야 참된 의전이다. 국민과의 대화로 시작한 예전 정부와는 달리 새 정부가 대국민담화로 문을 연 것은 또 어떤가. 비단 야당뿐만 아니라 상당수 국민에게 자칫 겁박용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어떤 분들은 말한다. 대선 때는 ‘육영수’도 보였는데 지금은 ‘박정희’만 보이는 것 같다고. 뿔난 대통령에게 참모들이 제대로 간언도 못한다고. 외부에서 말을 많이 들어 대통령에게 쏟아내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말을 적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2년 전, 한 저녁모임에서 방송인 임성훈씨를 만난 적이 있다. 말 잘하기로 국내 으뜸인 그조차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MC는 잘 듣는 겁니다. 말을 잘하려 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경청하다 보면 상대방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하찮은 의견이라도 꾹 참고 듣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말도 자주 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해야 할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쿠가와의 귀가 커진 것은 우직하면서도 주군에게 거친 말까지 쏟아내는 가신들 덕이다. 도쿠가와의 경쟁자들은 이들을 ‘미카와(三河·도쿠가와의 고향)의 보물’이라며 부러워했다. 일본 통일의 반석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닦고 통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해냈지만 정작 수백 년 평화를 유지시킨 사람은 도쿠가와다. 산업화를 일궈낸 박정희 대통령, 민주화를 이뤄낸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후세에 어떻게 기억될까. 성공 여부는 참모들이 대통령과 국민을 제대로 연결시키는 소통의 의전에 달렸다.



정 선 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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