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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에 나이·경력 상관 없다… 한국의 잡스 꿈꾸는 40인

중앙일보 2013.03.11 00:18 경제 2면 지면보기
9일 서울 장충동 세계경영연구원(IGM)에서 열린 ‘창업기업가 사관학교(IEA)’ 1기생 입학식에서 전성철 IGM 회장(맨 앞쪽)을 비롯한 벤처창업자·투자자·대기업 CEO·대학교수 등 IEA 교수진과 입학생들이 도전과 희망을 담아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앞줄오른쪽 끝부터 멘토·창업CEO 교수를 맡은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김준일 락앤락 회장, 노학영 리노스 대표,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윤홍근 제너시스비비큐그룹 회장, 최병오 패션그룹 형지 회장. [김상선 기자]


창업은 기술과 아이디어만으론 되지 않는다. 자금과 마케팅, 인사 모든 것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도전과 실행이다. 9일 한국에선 창업에 도전하는 23~62세의 ‘창업기업가 사관생도’들이 입학식을 치렀다. 같은 날 미국 텍사스에서는 수만여 명의 젊은 창업 희망자들이 모인 가운데 세계 최대 스타트업(신생기업) 박람회,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인터랙티브 2013’이 열렸다. 국적에 상관없이 예비 기업인들에게 성공한 창업가들이 해준 조언은 같다. “초라할 수밖에 없는 시작 단계를 창피해하지 말라” “미리 실패를 걱정해 주저하지 말라.”

‘창업기업가 사관학교’ 1기 입학식



9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세계경영연구원(IGM)에서 열린 ‘창업기업가 사관학교(IEA)’ 1기생 입학식. 희끗희끗한 머리, 양복 차림이 잘 어울리는 중후한 60대 신사가 힘차게 외쳤다.



 “박! 박 터지게 배워, 광! 광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업! 업고 가겠습니다!”



 최고령 입학자인 박광업(62) 전 웅진케미칼 부회장이다. ‘삼행시 자기 소개’ 뒤 4조 조원들과 함께 “도전! 창업! 성공!” 구호를 외치며 씩씩하게 마무리 짓는다. 대기업 임원까지 지낸 그가 왜 창업가 교육을 받으러 온 것일까.



 박씨는 “사실 처음에는 손자가 다섯이나 있는데 은퇴하고 좀 편하게 쉴까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일선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경북 영덕에서 동네 어르신을 상대로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



 그런데 ‘일자리를 만들어서 더 큰 봉사를 하라’고 주변에서 자꾸 권했다. 35년 월급쟁이로 일할 때 못다 이룬 ‘바람직한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박씨도 용기를 냈다. IEA에 지원하고 지난달에는 섬유 회사를 차렸다. “IEA 면접 때 다들 ‘왜 왔느냐’고 묻더군요. 젊은이의 기회를 뺏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지만 저도 꿈이 있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실현하는 기업을 만들어서 이 사회와 젊은이들에게 더 크게 베풀 겁니다.”



IEA는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 같은 세계적인 창업자를 길러내기 위한 약 1년(4학기)의 무료 교육 과정이다. 벤처창업자, 기업 CEO, 에인절투자자, 경영학과 교수 등 ‘창업생태계’를 이루는 구성원이 모두 교수진으로 참여했다. 초대 총장은 송자 명지학원 이사장이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오명 동부그룹 전자부문 회장,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고문을 맡았다. <본지 2012년 12월 11일자 B1면>



 ‘창업 DNA’를 가지고 몰려든 19~83세 417명 중 동영상 자기 소개와 조별 토론, 면접 등을 거쳐 IEA 1기생 40명이 선발됐다. 입학생의 68%(27명)가 석사 이상 학력이다. 미국 코넬대·KAIST 박사, 의사·치과의사, 미국 공인회계사 등 이력도 화려하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은 다양하지만 모두 도전정신이 충만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류정원(40) 힐세리온 대표는 2006년 3만6000여 명이 참가한 ‘우주인 선발 프로젝트’에 도전해 최종 10명에 뽑히는 등 다양한 도전을 해왔다. 서울대에서 물리학·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창업을 하는 등 10년간 업계에서 일하다가 2005년 의학전문대학원(가천의대)에 들어갔다. 인공지능·생명을 연구하는 데 한계를 느껴서였다. 2009년 의사가 된 뒤 검진센터와 응급실 등에서 전임으로 3년 넘게 일하면서 휴대용 무선 초음파 진단기 개발 아이디어를 얻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을 이용할 수 있고 일반 초음파 기기의 20% 이하 가격이다. 지난해 중소기업청이 주관한 국내 최대 창업경진대회 ‘슈퍼스타V’에서 왕중왕으로 뽑혀 상금 1억원을 받았다. 지난주 시제품이 출시돼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마케팅 작업에 들어간다.



류 대표는 “산모나 응급환자가 초음파 기기 혜택을 잘 못 받는 개발도상국에 꼭 필요한 제품”이라며 “저렴한 가격에 보급하고 기부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카카오톡 머리말은 ‘Dream, Dream, Dream~(꿈, 꿈, 꿈~)’이다.



 ‘싸이렌 장’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는 장은정(39·여)씨는 한쪽 귀에만 한 귀걸이 4개, 형광분홍빛의 매니큐어, 손가락마다 낀 색색 플라스틱 반지, 화려한 눈화장만큼이나 튀는 이력을 쌓아왔다. 장씨는 천문학자를 꿈꾸며 서울대에서 지구과학을 석사까지 전공하고 프로그래머로 전향해 LG CNS에서 일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3년 동안 주말과 밤이면 록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는 ‘싸이렌(매혹의 목소리를 가진 그리스 신화의 바다괴물)’이었다. 패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자 미국의 글로벌 패션브랜드 코치의 상품기획자(MD)로 전업했다. 이후 수년간 고급 구두 브랜드 등을 사고파는 ‘이베이 파워셀러’로도 한동안 활동했다.



장씨는 “패션과 IT를 동시에 해본 장점을 살려서 창업에도 도전한다”며 “패션계의 모든 정보를 모아 위키피디아처럼 만든 ‘스타일위키’를 영어와 한국어로 열기 위해 지난해 7월부터 네덜란드인 기획자 등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는 창업자가 성공할 때까지 평균 도전 횟수가 2.8회다. 청년 고용률 40%인 한국에서는 ‘한 번만 삐끗하면 큰일’이라는 불안감 속에서 한 번의 실패도 심각하게 여겨진다. 창업은 취직 못해서 하는 일로 취급되기도 한다.



IEA 최연소 입학생인 김진우(23·연세대 컴퓨터과학과 3년)씨는 유일한 대학생이다. 그는 “대학생 때 창업을 해야 한다”며 “이 나이 때 얻기 힘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지난해 9월 온라인 갤러리 운영업체 ‘아우름플래닛’을 창업동아리 친구 2명과 함께 세웠다. “친구들한테도 창업을 많이 권해요. 취업을 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학점 관리를 하잖아요. 솔직히 학점은 소수점 단위로 차이가 나고 스펙 쌓기를 하다 보면 다 비슷비슷해지는 걸요.” 김씨는 “창업하고 몇 달이 지나니 내가 경영이나 행정에 무지하다는 걸 알게 됐다”며 “공대생이라 기술은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익수(51)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은 KAIST 박사 출신으로 26년 동안 ETRI에서만 일했다. 국내외 특허만 50여 건이다. 어 연구원은 “우리가 개발한 기술과 실제로 쓰이는 세상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는 걸 느꼈다”며 “연구원과 중소업체를 연결하는 사업모델을 만들어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려 한다”고 말했다.



 ‘도전’을 내세운 IEA 신입생 40명은 입학식 때부터 6개 조로 나눠 자기소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벌였다. 예능 프로그램 ‘짝’을 응용해 CEO 멘토들에게 구애 작전을 펼치고, 민요 ‘닐리리야’를 개사해 구성지게 불렀다. 영어교육업체를 운영하는 이윤희(44·여)씨는 자사 캐릭터인 백발의 뚱보 아주머니로 분장해 조원들과 콩트를 하기도 했다.



“25년 동안 나도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함께 꿈을 꾸자(윤홍근 제너시스비비큐그룹 회장)” “포기만 안 하면 된다(김준일 락앤락 회장)”…. 웃으며 이들을 지켜보던 ‘창업 선배’들의 덕담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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