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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 주유소는 휘발유 값 2000원 넘기만 기다린다는데…

중앙선데이 2013.03.10 01:23 313호 25면 지면보기
#충북 청주시 봉명동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정현승(67ㆍ여) 사장은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GS칼텍스에서 기름을 공급받는 그의 가게 한 집 건너 옆에 알뜰 주유소가 들어선 게 지난해 초. 휘발유 가격이 L당 평균 2000원을 넘기면 정부는 알뜰 주유소에 L당 1800원에 휘발유를 공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달 말 열린 물가대책회의에서다. “알뜰 주유소가 생기고 나서 매출이 얼마나 줄었는지 몰라요. L당 100원 가까이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정부가 1800원짜리 기름을 대주면 우린 어떻게 되겠어요. 이럴 거면 차라리 휘발유 고시 가격을 다시 도입하는 게 나아요.”

박근혜 정부 첫 물가 대책, 기름값 인하 놓고 논란

#청주 개신동에 사는 조모(69)씨는 기름을 넣을 때마다 봉명동 알뜰 주유소를 찾는다. 4대 정유사의 간판 대신 알뜰 주유소 간판을 내건 이곳의 휘발유는 6일 기준 L당 1944원. 인근의 일반 주유소보다 훨씬 싸다. 그는 “알뜰 주유소가 생기고 동네 주유소들도 조금씩 가격이 내려가는 걸 느낀다. 진작에 이런 경쟁 시스템이 생겼어야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박근혜 정부가 빼든 첫 물가 대책, 알뜰 주유소 특별 지원안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정부가 한국석유공사의 재고 물량 등을 활용해 알뜰 주유소에 L당 1800원에 휘발유를 공급한다면 일반 주유소와 가격 차이는 L당 130원 정도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휘발유 가격이 정부가 제시한 행동개시 기준(L당 평균 2000원)에 근접하자 주유소와 정유사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정부가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가격으로 불공정 경쟁을 유도한다”는 불만이다.

알뜰 주유소가 처음 등장한 건 2011년 말. 자영 주유소들이 뭉쳐 정유사에서 기름을 공동 구매해 매입 가격을 낮추게끔 정부가 유도하면서다. 실제로 올 1월 말 기준으로 알뜰 주유소의 1년 평균 판매 가격은 휘발유 L당 1946.68원, 경유 L당 1756.36원이다. 전국 평균가격과 비교하면 각각 42.06원, 49.01원 저렴하고 3㎞ 반경의 주유소와 비교해도 각 35.13원, 40.60원 싸다.
자연히 손님이 몰리며 알뜰 주유소도 늘고 있다. 2월 말 현재 전국의 알뜰 주유소는 886곳. 전체 주유소의 6.9%로 몸집이 불었다. 황상철 한국석유공사 유통사업처장은 “손님이 몰려 알뜰 주유소의 판매 물량은 일반 주유소보다 36% 더 많고, 판매 물량으로 따지면 알뜰 주유소의 시장 점유율은 8.7%로 올라간다”며 “이미 알뜰 주유소로 전환하겠다고 100여 곳의 주유소가 석유공사에 신청해놓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특별 지원이 발표되면서 일반 주유소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정부가 계속 특정 주유소에 지원을 몰아주며 우리를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 주유소 업자들의 모임인 한국주유소협회는 최근 성명을 내고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반발했다. 심재명 주유소협회 과장은 “주유소 숫자가 너무 많아 폐업ㆍ휴업하는 곳이 속출하는데,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가격에 정부가 휘발유를 공급할 수 있느냐”며 “정유사와 계약 등으로 알뜰 주유소로 전환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주유소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적으로 편중된 알뜰 주유소만 지원할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유류세를 내리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건전한 경쟁” vs “죽으란 소리”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알뜰 주유소 지원이 석유 제품 시장에 건전한 경쟁을 촉진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알뜰 주유소가 확대됐다지만, 2월 기준으로 전국 석유제품 판매 물량의 87.3%는 4대 정유사가 공급하고 있다. 정부 측은 “독과점 구조에선 유통 가격에 거품이 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알뜰 주유소가 늘면 여기에 기름을 공급하려고 석유 제품 수입업체나 제5의 정유회사가 등장할 테고, 4대 정유사와 경쟁을 하며 가격 인하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알뜰 주유소가 생긴 뒤인 지난해 수입업체를 통해 정제 휘발유 8만4000배럴이 국내로 들어왔다. 2008년 이후 한 건도 없었던 휘발유 수입에 다시 물꼬가 트인 것이다. 정제 경유 수입량도 지난해 478만3000배럴로 2008년(36만9000배럴)의 열 배 이상으로 뛰었다. 전동욱 지경부 석유산업과 사무관은 “그동안 주유소 시장이 4대 정유사 소속으로 돼 있어 기름을 수입해도 공급할 곳이 없었다”며 “알뜰 주유소가 생기고 나니 ‘판로가 열렸다’며 석유 제품을 들여오는 수입업체가 속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을 위한 물류망까지 확충되면 4대 정유사와 경쟁하는 업체가 더욱 늘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예 제5의 정유사를 설립해 기름값을 잡겠다는 움직임도 나온다.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지낸(2002년) 이태복 국민석유회사 설립준비위원회 대표다. 이 대표는 “4대 정유사 독과점 때문에 국내 석유제품 가격이 유독 비싼 편”이라는 전제엔 동의하면서도 “알뜰 주유소로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석유 제품 유통은 마진이 크지 않아 아무리 비용을 절감해 가격을 내린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 그는 “중동산 중질유를 주로 들여와 파는 석유 수입처를 다변화하면 L당 200원까지 더 싼 기름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다”며 “국민 약정을 통해 자금을 모아 상반기 안으로 정유사를 출범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알뜰 주유소가 일부 순기능을 하더라도 최근의 정부 시책은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낸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알뜰 주유소 전환 지원금에 세제 혜택까지 국민 세금으로 주면서 기름을 싸게 대준다는 건 세금을 쏟아부어 알뜰 주유소만 배불리겠다는 것”이라며 “유류세 인하가 아니면 석유 가격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박완규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알뜰 주유소가 등장하며 기존의 4대 정유사 과점 체제를 흔들어놓는 순기능을 한 건 인정한다”면서도 “일반 주유소들도 채산성이 떨어져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알뜰 주유소에 대한 지나친 지원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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