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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적 감각으로 통일 기회 낚아채 분단 마침표

중앙선데이 2013.03.10 01:45 313호 28면 지면보기
1990년 2월 14일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오른쪽) 과 헬무트 콜 총리가 정상회담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헬무트 콜에겐 ‘통일독일의 총리’라는 찬사가 따른다. 그는 타이밍을 기막히게 활용했다. 동물적 리더십으로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의 초석을 쌓았다.

‘행복한 경제강국’ 독일의 리더십 해부 ⑥헬무트 콜

1989년 11월 26일 콜 총리(82~98년)는 구식 타자기를 꺼내 ‘독수리 타법’으로 글자를 치기 시작했다. 루드비히하펜 시 인근의 오거스하임 고향마을 작은 집에서 그는 통일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할 ‘독일통일을 위한 10개 항 프로그램’이었다. ‘유럽통합’의 토대 위에서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콜 정부에서도 극소수만 이 작업에 참여했다. 보안을 위해서였다. 외무장관인 한스 겐셔조차 제외됐다. 이틀 후 콜 총리는 본 의회에서 이를 발표했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정치지도자는 국가 위기 때 명확한 비전과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는 걸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89년 7월 동독 주민의 대탈출(엑소더스)부터 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까지 15개월의 시간은 20세기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 숨막히는 격동의 시기에 콜 총리는 동물적 감각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변화의 시작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조짐이었다.

동구권 붕괴가 시작된 89년 여름 콜은 총리직 사퇴까지 고민할 만큼 녹초가 돼 있었다. 특별한 업적도 없고 대중적 인기도 시들했다. 이듬해 총선에 대비해 기민당은 바덴뷔르텐베르크의 젊은 주지사인 로타 슈페트를 차기 총리 후보감으로 물색할 정도였다. 자매당인 기사당과 연정파트너 자민당도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그는 7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볼프강 호수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그곳에서 정국구상을 가다듬었다. 휴가 직후 당내 반대파인 하이너 가이슬러 사무총장을 경질했다. 하지만 9월 전당대회에서는 또 다른 반대파 리타 쥐스무트에게 연방의회 의장자리를 안겨줬다. 그는 후계자를 키우지 않고 그런 식으로 정적들을 제압해 나갔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의 날 베를린의 제국의회 건물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동·서독 지도자들. 오른쪽부터 로타어 데 메지에르 동독 총리, 리하르르트 바이츠체커 대통령, 헬무트 콜 총리, 콜 총리 부인 한네로레 여사, 디트리히 겐셔 독일 외무장관. [중앙포토]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충실히 계승
독일 통일의 첫 번째 계기는 89년 7월 소련의 최고권력자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이었다. 당시 콜 총리는 남 모를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련에 대한 35억 마르크의 차관과 선진 기술 제공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높았다. 그가 내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새 시대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종주국’은 붕괴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다. 콜은 소련과 고르바초프의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는 곧 동구권 국가의 붕괴를 의미했다. 동독 정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동독 붕괴의 서막은 89년 여름 동독 주민들의 헝가리 탈주 사태였다. 헝가리 측은 “서독으로 가고 싶은 시민들을 동독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콜 총리에게 전했다. 그는 동물적 직감으로 통일이란 태풍이 몰려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는 인위적 개입 없이 사태를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러다 헝가리에 5억 달러의 차관을 승인해줬다. 콜에게 정치란 주고받는 것이었다.

89년 9월 기민당 전당대회 후 콜은 녹초가 됐지만, 더 이상 전립선 수술을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순간이 또 다가왔다. 이번엔 동독 난민들이 체코 프라하로 몰려들었다. 동·서독 외무장관은 유엔에서 만나 ‘프라하의 동독 난민들이 동독 지역을 거쳐 열차로 서독으로 이주하게 한다’는 데 합의했다. 외무장관 겐셔는 프라하로 날라갔다. 전 세계 언론이 이 역사적 장면을 놓칠 리 없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행은 통일 과정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부분 중 하나였다.

89년 10월 7일은 동독 건국 40주년이었다. 동독 공산정권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군사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는 “너무 늦게 오는 사람을 인생은 벌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동독 정권을 겨냥해 개혁하지 않으면 몰락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는 동독 공산정권에 치명타였다. 동독은 주민 탈출과 대규모 시위, 그리고 소련의 압박이라는 난관에 부닥쳤다.

콜 정부는 원칙적으로 빌리 브란트 정부(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는 동·서독 관계를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묶어놓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선 경제 지원과 정치적 화해만이 대안이었다. 기민당 내에서 이견이 많았지만 콜은 집권하자마자 동독 정부에 유리한 조건으로 10억 마르크 차관을 내줬다. 동·서독 주민 사이의 서신 교환, 전화 통화, 상호 방문 등 인도주의적 조건을 내걸어서다. 그 덕에 84년 한 해 서독에서 동독을 방문한 이가 500만 명, 동독에서 서독을 방문한 이가 160만 명을 넘어섰다. 34개 동·서독 도시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스포츠 교류도 대폭 늘었다. 서독은 통일 전까지 3만3755명의 동독 정치범을 석방시키려고 35억 마르크(1조7500억원)를 대줬다. 1인당 5만 마르크(약 2500만원)를 준 셈이다.

복지 강화하고 서방과 연대 철저히 지켜
콜 총리는 보수 노선을 확고히 지켰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궤를 같이했다. 하지만 콜은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독일식 복지정책을 강화했다. 무엇보다 ‘가족친화적인 사회’를 주창했다. 유치원 설립을 확대하고,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출산 장려금을 대폭 늘렸다. 콜은 좌파들이 제기한 ‘독일 중립화안’에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아데나워의 유지인 ‘서방과의 연대’를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자유롭고 통합된 유럽 안에서의 독일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콜은 미국·프랑스·영국 등이 도와주지 않으면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방 지도자들과의 인간적 신뢰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인 이유였다.

89년 7월 15일.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됐다. 반체제 단체인 노이에스 포럼(Neues Forum)이 결성됐다. 목사·예술가·작가·교사 등 동독 지식인들이 모여 처음으로 자유·민주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동독 정권 붕괴와 동·서독 통일로 가는 도화선이었다. 7월부터 시작한 동독 주민들의 엑소더스 행렬은 여름이 지나면서 더욱 길어졌다. 이미 헝가리·체코 등을 통해 서독으로 이주한 숫자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서독이 수용 가능한 난민의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10월 동독에서 동시다발로 사건들이 터졌다. 동독 주요 도시마다 반정부 시위가 본격화했다. 처음에는 “우리는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였던 구호가 곧 “우리는 한민족(Wir sind eins)”이란 통일 구호로 바뀌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적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동독 시민혁명에 기름을 부었다.

역사의 물줄기는 우연이든 실수든 작은 사건 하나로 바뀔 수 있다. 독일 통일 과정은 그런 좋은 사례다. 연일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운명의 날인 89년 11월 9일 오후 6시55분. 동독공산당 정치국원인 권터 샤보브스키는 “즉각 여행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내외신 기자들은 긴급뉴스를 타전했다. 서독을 향한 엑소더스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 동·서독 주민들은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장벽을 망치로 깨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단의 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폴란드를 국빈 방문 중이던 콜은 곧바로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브란덴부르크 문에 도착했을 때 동·서독 시민들은 환호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콜은 전광석화같이 통일프로그램을 발표했다.

화폐통합으로 동독 탈주행렬 막아
동독 주민들은 당장 통일을 요구했다. 여기서 콜의 정치적 본능이 다시 한 번 발휘됐다. 대량 이주 사태를 막기 위해 화폐통합 카드를 꺼낸 것이다. 전후 에르하르트 총리가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발전을 추구한 것과 비교하면 그 성격이 정반대다. 콜은 당시 4:1이던 동·서독 환율을 1:1로 하겠다는 파격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1인당 6000마르크를 즉각 바꿀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집권당과 서독의 연방은행 총재까지 반대하고 나섰지만 화폐통합 발표 뒤 탈주 행렬은 가까스로 진정됐다. 엑소더스 물결을 돈의 역류로 막은 셈이다.

콜 총리는 90년 2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2(동·서독)+4(미·소·영·프)’ 회담을 열 것을 제안했다. 독일 통일의 방식·조건을 국제사회와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되 구 동독 지역엔 외국군 주둔을 허용하지 않고, 기존 국경선을 준수하는 방안이 확정됐다. 아직 최종 담판이 남아 있었다. 그는 90년 7월 14일 고르바초프의 별장이 있는 코카서스로 향했다. 마침내 “독일 전체가 나토에 가입해도 된다”는 ‘코카서스의 기적‘이 연출됐다.

콜 총리는 ‘선거의 황제’였다. 동독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사민당을 제치고 제1당이 됐다. 10월 3일 동독의 5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됐다. 통독 후 처음으로 치러진 총선에서도 콜은 승리했다. 그러나 통일 후 더 큰 시련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쟁력이 엉망인 동독 경제와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이었다. 동독의 높은 실업률도 골칫거리였다. 콜 총리와 기민당은 98년 총선 때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에 패했다. 이듬해 기민당의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돼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콜은 16년간 정권을 잡은 최장수 총리였다. 그의 뒤를 이은 기민당 총재가 자신의 ‘정치적 양녀’라고 불리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콜의 개인 삶엔 굴곡이 많다. 그는 평소 “내 몸무게는 국가기밀”이라고 말해왔다. 그래선지 건강이 나빠 투병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조강지처인 첫째 부인은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었다. 콜은 자식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아들 발터는 최근 『인생과 인생살이』를 출간하면서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고 산 지가 20년이 넘었다”고 고백했다.



김택환 1983년부터 10년간 독일에서 공부한 뒤 학자·언론인 생활을 하며 독일을 꾸준히 공부해 왔다. 대한민국의 미래 모델을 모색하기 위한 『넥스트 코리아』를 최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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