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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이세돌 "상금 10억 주면 구리와…"

중앙일보 2013.03.09 00:04 종합 18면 지면보기

알파고와 이세돌의 4차 대국 직후, 중앙일보 편집국 곳곳에선 알듯 말듯 한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탄성의 성격은 뭐라 규정하기 애매합니다. 그저 이심전심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본지는 딱 3년 전 요맘때, 이 9단을 만났습니다. 지금,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소개합니다. 진득한 사람 냄새가 여기 있습니다.

취미가 뭐냐고 묻자 이세돌 9단은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한다”고 답했다. “동이·이산 등 사극을 앉은 자리에서 12시간씩 몰아 본다. 샐러리맨의 성공 신화를 다룬 일본의 시마 시리즈도 한 번에 다 봤다”는 말에 그의 매서운 집중력을 새삼 실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는 야생마다. 전남 목포에서 배로 두 시간 떨어진 신안 비금도에서 자란 그는 좁은 기원 대신 너른 바다에서 꿈을 키웠다. 13세 때 프로에 입단했고 16세 때 중학교를 그만뒀다. 공격적인 야생마, 역전의 승부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바둑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별안간 휴직 선언을 하는 등 튀는 행보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미워할 수 없는 천재’다. 안전하게 이기는 바둑 대신 매 순간 ‘예상 못한 승부’를 선택하는 타고난 공격수이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3년 내 은퇴’를 선언하고 신사업을 구상하는 ‘괴짜’ 이세돌(30) 9단을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사람 속으로] ‘3년 내 은퇴’ 선언… 괴짜 승부사 이세돌

 
- 3년 뒤면 프로기사가 아닌 사업가가 되는 건가.

 “바둑 사이트 고9단(www.go9dan.com)을 열었다. 영어권 국가에 바둑을 보급하기 위해 서버도 미국에 뒀다. 프로기사들도 바둑 사이트를 많이 찾는데 이들에게 수익원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고수와의 대국을 통해 ‘한 수 배우는’ 대가를 치르면 더 많은 고수가 참여하면서 바둑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아마추어와 프로 모두 윈- 윈인 게다.”

 - 바둑은 사양산업인 데다 영어권 국가에선 생소한 경기다.

 “불모지가 맞다. 한데 이미 인기가 한풀 꺾인 한국에서 바둑을 되살리는 것보다는 새로운 땅에 보급하는 게 더 쉬울 수 있다. 또 한국에선 이해 관계자가 많아 내 위치가 좀 애매한데 미국에선 내가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했다.”

 - 벌써 노후를 생각하는 건가.

 “야구는 은퇴 후 해설위원·감독·코치 등 길이 다양하지만 바둑엔 고작해야 해설가 정도다. 난 전성기가 지나면 경기 외에 다른 일로 돈을 벌 생각 없다. 바둑 사이트도 보급에 꿈이 있을 뿐 손익이 0만 돼도 성공한 것이라고 본다.”

 - 해설가는 목소리 때문에 포기했나.

 “나와 맞지 않는 일 같다. 입단 후 열네 살 때 스트레스가 심해 실어증이 왔는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기관지가 약해졌다. 신경이 마비된 건데, 어린 나이에 뭘 알았겠나. 부모님은 신안에 계시고, 서울에서 보호자 역할을 했던 형(이상훈 7단)이 입대해 병원도 못 갔다.”

 - 콤플렉스인가.

 “17년이나 됐으니 이제 감수하며 산다. 사람들도 내 목소리에 익숙해지지 않았나. 웃으며 넘어가게 됐다.”

지난해 7억 벌어 … 3년 연속 상금왕
 
이세돌 9단(오른쪽)이 2010년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구리 9단과 대국하고 있다.
 이세돌 9단은 지난해 12월 1000승 클럽에 가입했다. 조훈현·이창호·서봉수·유창혁·서능욱 9단에 이어 국내 여섯 번째다. 그동안 받은 상금도 적잖다. 지난해 7억200여만원을, 2011년 7억7000만원을 받는 등 3년 연속 상금왕에 올랐다.

 - 재테크는 어떻게 하나.

 “잘 못한다. 손해도 많이 봤다.”

 - 투자 권유나 사업 제의도 많을 듯한데.

 “아주 많았다. 주식도 크진 않지만 손해를 봤고. 역사가 깊다(웃음). 돈을 투자하면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까. 프로기사 중 재태크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 사기당한 적도 있나.

 “그게 없는 사람도 있나? 인생에 한두 번은 사기당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 별로 개의치 않는다. 크게 당하는 것보다 조금씩 조금씩 당하는 게 낫다. 사기도 당해봐야 다음 번에 또 안 당하지.”

 - 난 아직 안 당해봤는데.

 “경험을 더 쌓으셔야겠다.”

 - 돈을 밝힌다는 얘기가 있는데 인정하나.

 “돈, 당연히 밝힌다. 프로기사에게 상금은 자존심이다. 두말할 것도 없다. 실생활에서 돈을 너무 밝히면 문제가 있겠지만 프로기사가 상금을 챙기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스포츠만 봐도 선수들 연봉 협상 과정이 치열하고 결렬도 잦은데, 그럼 그들은 얼마나 돈을 밝히는 거냐. 상금은 자존심이란 맥락에서 보면 내가 돈을 많이 밝히는 건 맞다.”

 - 그래서 상금이 적은 게임은 소홀하고 큰 게임에서 힘을 발휘하는 건가.

 “억지로 열심히 안 두려는 건 아닌데 차이가 나는 건 사실이다. 임하는 태도가 다르니까. 가령 상금 2억원인 경기와 3000만원인 경기가 동시에 열리면 아무래도 액수가 큰 쪽에 관심이 간다.”

 - 한데 정작 상금이 가장 센 응씨배(40만 달러)는 우승을 못했다.

 “맞다. 늘 초반에 탈락했다(웃음). 4년에 한 번 열리는데 룰 자체가 독특하다. 초읽기 때 제한시간을 다 쓰면 벌점을 주는 시스템이 자꾸만 거슬리더라.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3년 뒤 마지막 기회가 한번 더 남아 있다.”

 바둑은 전쟁이다. 승리를 위해 프로기사들은 어릴 때부터 패배한 경기들을 복기한다. 승패를 두고 크게 울거나 웃는 대신 차분히 앉아 실수를 곱씹어야 하는 게 바둑이다. 모의고사 보는 것보다 더 싫은 게 오답노트 정리일진대 승부사들에겐 일상이다.

 - 대국에서 진 뒤 복기하는 게 힘들지 않나.

 “전혀. 오히려 어떻게 졌는지 모르는 게 더 답답하다. 이기고 지는 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 이유를 알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어떻게 이겼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 오답노트 정리와 비슷한 개념인가.

 “약간 다른 것 같다. 우린 바둑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답노트가 예술은 아니니까. 도자기 구울 때도 마음에 안 들면 도자기 모양이나 가마 온도, 굽는 시간 중 잘못된 부분을 곱씹지 않나.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아야 다음에 더 좋은 걸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우린 더 훌륭한 예술작품을 위해 복기를 한다.”

 - 반면 기보 놓는 건 안 좋아한다고 들었다.

 “난 앉아서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시합 뿐 아니라 자장면 내기를 해도 살아있는 바둑은 재밌는데, 기보를 놓는 건 내가 아닌 다른 두 사람의 생각을 유추해가며 놔야 하니까 어렵다.”

 - 그게 창의력의 원천인가.

 “난 무얼하든 ‘왜’라는 질문을 가졌다. 시합 전날 연구 안 하느냐는 얘길 듣기도 하는데 난 늘 머릿속에 바둑판을 두고 산다. 술을 마시다가도, 드라마를 보다가도, 당구를 치다가도 불현듯 좋은 수가 떠오르면 머릿속 바둑판에 놔보는 거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그런데 요즘은 신수 개발이 어려운 환경이다. 기보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엔 신수가 상당 기간 통했다. 한데 지금은 경기 직후 인터넷을 통해 다같이 분석한다. 그럼 내가 머리 싸매고 개발한 신수가 모두의 것이 돼버리는 거다. 저작권이 없어진다고나 할까…, 좀 아쉽다.”

승리보다 패배의 아픔이 오래가

  화제를 바꿔 패배에 대해 물었다.

 - 중요한 대국을 두다가도 딴 생각을 한다고.

 “그렇다. ‘점심은 뭘 먹을까’부터 저녁은 뭘 먹지, 아 오늘 옷을 잘못 입고 왔네, 금요일인데 돌아가는 길이 막히진 않을까 등 사소한 생각들을 한다. 중요한 순간엔 집중하되 사람인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할 순 없다. 특히 바둑 초반에 상대가 필요 이상으로 장고를 할 땐 정말 잡생각이 많이 든다.”

 - 연구생이나 어린 기사들에게 터무니없이 지는 경우가 있는데.

 “어린 친구들이랑 둔다는 부담도 있고, 실제로 실력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컨디션이 나쁘면 충분히 질 수 있다. 팬들은 실망할 수 있지만 난 그저 ‘기사 쓸 거리 생겼겠네’라며 넘어가지 충격 받진 않는다. 또 연구생이든 누구든 내가 실력 있는 걸 다 알기 때문에 ‘어쩌다 한 판 졌겠지’라고들 생각한다.”

 - 강자의 자신감인가.

 “10번기에서 졌다고 하면 정말 큰 일이지만 프로세계에서 한번의 승패를 두고 크게 의미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얘기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10번기로 넘어갔다.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라이벌인 구리 9단의 대결. 바둑계의 빅매치는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

 - 구리 9단과는 궁합이 잘 맞나 보다.

 “구리와 두면 바둑 자체가 재미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질 것 같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격도 하고. 서로가 안정적인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역전승도, 역전패도 자주 나온다. 스토리가 있는 바둑은 두는 사람도 재밌고 보는 사람도 흥분되기 마련이다.”

 -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에 비교하면.

 “글쎄. 그들은 한·일 관계라는 특수성도 있고, 우리만큼 친분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구리와 나는 라이벌인데 김연아 선수는 ‘아사다보다는 내가 낫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웃음).”

 - 10번기는 뜸만 들이고 진행이 안 된다.

 “올해 했으면 좋겠다. 구리도 마다하지 않을 거다.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주면 둘 다 피하지 않을 스타일이다.”

 - 스폰서가 없어서 안 되는 건가.

 “쉽지가 않다. 10번기에서 지면 굉장한 타격을 받지 않겠나. 내가 지면 난 평생 구리보다 못한 놈이 되는 거다. 구리도 마찬가지고. 5대 5일 경우엔 한 판을 더 둬 6대 5를 만들 거고. 바둑 인생을 건다고 생각하면 작은 상금으로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 얼마면 되나.

 “우승 상금만 10억원이래도 할까 말까다.”

 지난해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 3국에서 이 9단은 구리 9단에게 반집승을 따냈다. 대회 통산 네 번째 우승이다. 중반까지 밀리다 270수 만에 극적인 승리를 거둔 이세돌에게 바둑팬들은 열광했다.

 - 게임에 지고 구리가 뭐라 하던가.

 “지난 1월 구리의 결혼식에 갔는데 ‘굉장히 아팠는데…, 그래도 승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 결혼식에서 그런 얘길 할 줄은 몰랐다(웃음).”

 - 잠이 안 왔을 것 같다.

 “안 왔겠지. 나도 그땐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우승은 늘 기쁜 일이지만 보통은 ‘졌으면 참 힘들었겠지, 이겼으면 다행이다’ 하는 정도인데 이번엔 달랐다. 하루 이틀은 정말 기분이 좋더라.”

 - 승리의 기쁨이 하루 이틀밖에 안 가나.

 “하루 이틀, 길어야 3일이다. 금방 잊는다. 대신 진 경기에 대한 패배감은 꽤 오래 간다. 한 달이 지나도 ‘아 내가 그때 졌지…’라는 생각이 불쑥 든다.”

기보, 예술 작품으로 남기고 싶다

 -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패배는.

 “2001년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이창호 사범님께 2연승하고 자만한 나머지 3연패한 것. 12년이 지났는데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하면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다. 당시 내 기세가 대단했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됐던 것 같다. 타이틀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집중력이 무너진 게다.”

 -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느낀 적이 있나.

 “아직은 없다. 바둑에서 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한 번도 밀려본 적이 없다. 슬럼프도 있고 순간 힘들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내 나이 또래에선 내가 계속 최고였다. 18살부터 성적을 내 20살 때 세계대회 첫 우승을 했고. 정확하게 단계, 단계를 밟고 왔다.”

 - 불행하게도 이세돌과 같은 세대에 태어나 최고가 되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글쎄. 예전 조훈현 사범님이나 이창호 사범님은 1인자로 주변에 틈을 안 줬다. 거의 독재를 했지. 근데 난 민주적이지 않나. 최철한 사범이나 박정환 사범도 자기만의 타이틀이 있고 나름 일가도 구축했으니 크게 죄책감은 없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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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꿈은.

 “그래도 랭킹 1위는 이세돌이지 않을까 정도가 아니라 ‘바둑 하면 이세돌’이란 독보적 위치에 서고 싶다. 내 기보들을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남기고 싶고. 바둑 외적인 분야에도 욕심이 난다. 바둑 저 정도 두면 사업이든 보급 활동이든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는 인터뷰 내내 거침이 없었다. 자신감과 잘난 척의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다가도 스스로를 ‘운이 좋은 기사’라고 평하며 겸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둑팬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그의 숱한 명승부는 쉬운 길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아무도 예상 못한 최고의 신수를 위해 늘 고민하는 그의 성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밉지 않았다. 이세돌, 그의 다음 한 수는 또 어떤 것일까.

글=채윤경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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