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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4조원대 굴리는 스타 펀드 매니저 서울대 나왔다면…”

중앙일보 2013.03.06 04:10 강남통신 6면 지면보기
여의도 바닥에서 그만큼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도, 또 그만큼 욕을 많이 먹는 사람도 드물다. 잘하면 “이 판을 말아먹을까 걱정”이라고 욕먹고, 못하면 당장 “그럴 줄 알았다”고 욕먹는다. 그런데도 그는 기 죽지 않는다. 3년 전 자문형 랩 돌풍을 일으키며 시중의 돈을 싹쓸이할 때는 물론이고,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로 수익률이 고꾸라졌을 때도 그는 특유의 자신만만함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가 꺾이면 나를 숏 쳐라(팔아라), 그러나 경기가 살아나면 다시 내 세상이 온다”고 했다.


인터뷰- 박건영 브레인자산운용 대표 (상)
외환위기 때 주식으로 돈 날린 후 주식 공부
학벌·배경 달리는 설움 견디며 ‘신화’ 반열에
늦게까지 학원 순례하는 딸 보기 안쓰러워
이게 한국 교육 현실인가 싶기도

글=안혜리 기자 , 사진=김경록 기자



박건영(46) 브레인자산운용 대표 얘기다. 박 대표는 미래에셋과 트러스톤 등 거치는 운용사마다 디스커버리·칭기스칸 등 대표 펀드를 맡아 고수익을 낸 스타 펀드 매니저 출신이다. 40대 초·중반에 이미 ‘신화’ 소리까지 들었다. 2009년 브레인투자자문(현 브레인자산운용)을 세웠을 때 1000억원이었던 운용자산을 2년 만에 6조원까지 불렸으니 말이다. 자문형 랩 바람이 한 풀 꺾이며 돈이 일부 빠져나가긴 했지만 여전히 4조원대의 돈을 굴린다.



 하지만 불과 15년 전만 해도 이런 그의 모습을 상상하긴 어려웠다. 아무 가진 것 없는 지방대(경북대) 출신 월급쟁이, 이게 당시의 그였다.



 외환위기로 나라 곳간이 거덜나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돈을 꿔야 했을 때 많은 국민이 직장을 잃고 고통에 신음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바로 이때 기회를 잡았다. 바로 주식과 조우한 것이다. 증시가 급락하며 많은 개인 투자자가 재산을 탕진한 시기에 주식으로 기회를 잡았다니, 대체 무슨 얘기일까.



 사실 박 대표 역시 이때까지 주식과 좋은 인연은 없었다. 입사 3년 만인 1995년엔 증권사 다니는 고교 동창한테 1200만원을 맡겼다가 100만원만 돌려받았다. 또 예금 하듯 자산 일부를 한 증권사에 일임매매 맡겼는데 하필 그 종목이 IMF 직격탄을 맞아 13번이나 하한가를 맞았다. 돈을 불리기는커녕 1000만원대 빚만 졌다. 보통 이렇게 한두 번 데이면 주식은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는 반대였다. 미친 듯이 주식을 공부했다. 이유가 있었다. 다니던 회사가 안정된 곳이면 “월급이나 받자”고 했을 텐데 회사가 불안하니 다른 살 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IMF로 금융계가 휘청하면서 당시 언론에선 그가 다니던 산업리스가 정리될 거란 보도가 흘러나왔다. 340명이던 직원은 70명으로 줄었다. 회사는 망할 것 같고, 6년을 일했는데 빚 갚고 나면 화정에 사둔 부동산을 다 합해도 순자산이 1400만원밖에 남지 않았다. 유일하게 믿었던 대구 지역 유지인 장인 어른마저 “용기를 잃지 말게” 한마디뿐 돈 구경은 시켜주지도 않았다.



 아침 잠이 많았지만 이때부터 스스로 아침형 인간으로 탈바꿈해 미친 듯이 일했다고 한다. 버스가 이미 끊긴 시간, 주머니엔 택시비가 9000원밖에 없어 다동 사무실에서 창동까지만 택시를 타고 간 후 상계동 집까지 50여 분을 걸어간 적도 있다. 이때가 새벽 4시였다. 그러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오전 7시30분에 출근했다. 회사 일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틈틈이 잠을 줄여 주식 공부를 했다. 200원, 300원짜리 잡주로 자신의 타고난 투자본능을 확인한 것도 이때다.



 2000년 드디어 첫 기회가 왔다. 당시 산업리스가 갖고 있는 1조원어치의 보유주식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주식을 살 수는 없고 팔 권한만 있는 일이었다. 보통 주식은 사면서 배우는데 박 대표는 파는 것부터 배운 셈이다. 그는 “주식은 좋은 가격에 사는 것보다 빠져나올 타이밍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며 “이때 잘 배워서인지 나보다 더 잘 파는 놈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서른다섯 살이던 2002년에 두 번째 위기, 아니 기회가 왔다. 보유 주식을 다 팔아 부서가 없어지자 자금부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핵심부서였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하루 종일 주식 매매 단말기만 보고 싶었다. 무작정 사표를 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남이섬에 갔는데 앞으로의 인생이 불투명하니 고작 세 개에 만원인 옥수수 사먹기가 힘들더라”고 회상했다. 그때 아내는 “기 죽지 마라, 평소와 똑같이 쓰라”고 했다.



 이런 통 큰 아내의 말이 위로가 되긴 했지만 현실에선 별 도움이 안 됐다. 이때 그를 도와준 게 당시 직장 상사였던 조재환 전 브레인 고문이다. 주식을 사고팔아 수익을 낸 실적(트랙 레코드)이 없어 아무 운용사에서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조 전 고문은 두 달 반 넘게 이력서를 들고 다니며 자기 선후배에게 부탁한 끝에 밸런스 주식투자자문에 박 대표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펀드를 맡아 운용하기는커녕 6개월 동안 ‘벽면수도’ 생활만 했다. 아무리 졸라도 그가 원하는 펀드 매니저는 시켜주지 않았고, 명문대 출신 펀드 매니저들은 다들 그를 무시하고 ‘왕따’시켰다. 그러다 때마침 기관고객이 수익률 나쁜 펀드 하나를 회수 통보했다. 회사는 “어차피 안 될 펀드”라며 그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다. 그렇게 박건영의 펀드 매니저 인생이 시작됐다.



 그리고 2009년, 아내는 그동안의 성공을 뒤로 하고 위험이 도사리는 창업을 하려는 박 대표에게 그간 남편 몰래 모았던 통장을 건넸다. "큰 길을 가라”면서. 남이섬에 이어 이렇게 두 번,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아내는 큰 힘이 됐다.



 그래서일까. 때로는 아내와 교육철학이 다르지만 뭐라고 크게 간섭하지 못한다. 아내는 열심히 시켜 큰딸을 올해 대학(한양대)에 보냈다. 둘째는 첫째보다 더 일찍부터 사교육을 받고 있다. 밤 11시에 들어가도 학원 숙제 하고 있는 작은딸(초3)이 안쓰럽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다.



-대학 동기 중 가장 성공했겠다. 학교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한번은 모교에서 강연해 달라고 요청이 왔다. 해줄 말이 없어 거절했다. ‘꿈을 가져라’는 건 가식이고 거짓이다. 그러나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 기회가 세 번은 온다. 기회 올 때를 대비해 평소 준비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 아무리 공부 잘했어도 일단 지방대 가면 그냥 지방대생일 뿐이다. 학벌·배경 없는 놈의 설움을 너무 잘 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지금 내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그때 서울대 갔으면 난 지금 어느 회사 월급쟁이 하고 있을 거다.”







펀드 매니저는



자격증만으론 안 된다 진입장벽 높지만 …증권사 경험 도움될 것




요즘 자산운용사는 대부분 신입 직원을 뽑지 않는다. 대학 졸업해 바로 펀드 매니저가 되는 길이 사실상 원천봉쇄돼 있다는 말이다. 물론 길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극히 일부 운용사가 대졸 신입 공채를 하기 때문이다. 벌써 5년째 대졸 공채로 신입사원을 뽑고 있는 박건영 브레인자산운용 대표에게 펀드 매니저란 어떤 직업인지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업계 진입이 무척 어렵다.



 “맞다. 내가 처음 펀드 매니저가 된 게 35살이다. 그때(2002년)였으니 가능했다. 당시 전체 공모 펀드 규모가 8조원에 불과할 정도로 산업 자체가 크지 않았다. 지금은 110조원이다. 만약 현재 35살인데 (지방대 출신에 아무 경력 없는) 나 정도 스펙이라면 불가능하다. 난 다행히 이 매니저가 된 후 숫자(수익률)가 나왔다. 수익률 높은 펀드를 만들면 배경이 뭐든 아무도 무시 못한다.”



-신입을 안 뽑는데 어디서 경력을 쌓나.



 “증권사 리서치센터에 가서 업종 애널리스트 경력을 먼저 쌓다가 기회를 봐서 옮길 수 있다. 물론 그것마저 쉽지 않다.”



-요즘 많은 대학생이 금융업 진출을 꿈꾸며 각종 자격증에 매달린다. 도움이 되나.



 “펀드 매니저 자격증이나 투자상담사 자격증 등 관련 자격증을 무조건 따더라. ‘내가 이만큼 이 업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정도이지 실제론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채용은 물론이고 펀드 매니저가 됐을 때도 그런 자격증 따면서 배운 건 아무 소용 없다.”



-다른 운용사는 공채를 거의 하지 않는다. 굳이 하는 이유는.



 “2009년 내가 사업을 시작하니 전과는 완전히 다르더라. 운용·인사 등등 난 아침부터 오만 가지 일로 뛰는데 운용만 하면서 나만큼 성적이 안 나오면 당연히 맘에 안 든다. 완벽한 걸 요구했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창업했는데 대부분 못 견디고 나갔다. 그러니 다른 운용사 매니저는 당연히 오지 않는다. 있던 사람 다 나가고, 아무도 오지 않고. 상식적으로는 회사가 이미 없어졌어야 한다. 회사를 유지하려면 바닥부터 키워야 했다. 그래서 공채를 시작했다. 이건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배운 거다. 미래에셋은 힘든 조직이다. 그래도 공채는 안 나간다. 브레인이 딱 그렇다.”



-운용업, 특히 브레인에 서울대 출신이 많다.



 “운용업은 소수의 인재가 많은 자산을 운용해 고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일인당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 써보니 나보다 똑똑하고 성실하다. 그런 애들이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1까지 일한다. 그것도 매일 ‘똑바로 못하느냐’는 내 호통을 듣는 걸로 일과를 시작한다.”



-미래에셋에서 매니저 생활 할 때가 궁금하다.



 “펀드 매니저가 된 지 3년 만인 2004년 미래에셋에 스카우트됐다. 비록 작은 투자자문사(밸런스)에 불과했지만 내 회사처럼 맘대로 주무르고 있었는데 옮기기 싫었다. 딱 한 가지만 요구했다. 미래에셋 대표 펀드인 디스커버리를 달라고 했다. 대신 월급을 포기하겠다고 했다(※그가 포기하겠다며 제시한 월급이 1000만원이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월급 깎아서 옮기는 거 아니다”며 당시 받던 연봉의 1.5배를 줬다. 당시 1등 펀드가 송상엽 매니저(현재 KB자산운용 상무)가 맡아 하던 PCA 펀드였다. 디스커버리랑 수익률이 12%포인트나 차이가 났다. 박 회장이 ‘5개월 안에 PCA를 잡으라’는 미션을 내렸다. 내가 펀드 매니저 하면서 처음 만난 업계 사람이 송 상무라 지금도 가장 가깝다. 6개월간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독하게 수익률 올렸다. 결국 그해에 디스커버리가 펀드 대상 받았다. 박 회장이 너무 기분이 좋아 기사 딸린 차 내주고 운용1본부장(이사)을 시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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