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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할머니 7명 “우리 초등생 됐어요”

중앙일보 2013.03.06 00:48 종합 16면 지면보기
경남 하동의 60세 이상 할머니 7명이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고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할머니들이 4일 이 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입학식에 참석했다. [사진 하동군청]


“아이고, 난생처음 그리는 그림이라 잘 못 그리겠네.”

“배움 길 열어준 학교에 감사”
노인만 집단 입학 진기록
폐교 위기 학교도 활기 찾아



 5일 오전 경남 하동군 고전면 고전초등학교 1학년 교실. 담임교사의 얼굴 그리기 미술 수업시간이었다. 하지만 교실은 할머니들의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했다. 담임 박윤희(50) 교사가 “○○○ 할머니, 쑥스러워 마시고 제 얼굴 잘 보고 다시 한 번 그려 보세요”라며 격려했다. 할머니들은 각자 그린 그림을 보여 주며 자랑했다.



 이 학교 올해 신입생은 60세 이상 할머니 7명이 전부다. 남향순(60)·전임선(67)·정연정(71)·박봉희(74)·이한선(75)·김필엽(78)·정태희(79)씨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4일 손자뻘 되는 재학생 선배 27명의 축하를 받으며 입학했다. 고전면장학회가 주는 10만원씩의 장학금도 받았다. ‘할머니 초딩’들은 이날 한글수업도 했다. 박 교사가 칠판에 쓴 대로 담임·교장 이름을 공책에 옮겨 적었다. 오전 4시간의 수업이 끝나자 할머니들은 통학버스로 귀가했다.



 고전초등학교는 이들 할머니 덕분에 올해 신입생 없는 학교를 면했다. 또 노인만 입학한 전국 유일의 초등학교가 됐다. 농촌지역 고령화로 취학아동이 줄고 있는 시골학교가 노인들의 새로운 배움터가 된 것이다.



 할머니들을 학교로 이끈 사람은 남향순 할머니의 딸 정정순(43)씨. 어머니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문턱을 밟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올해 초 학교를 찾아 진학상담을 했다. 하지만 “올해 입학생이 없어 혼자 다니기 어려우니 다음 해 다른 어르신과 함께 입학하는 것이 어떠냐”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정씨는 단념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자격에 연령 제한이 없다는 사실에 착안해 노인 여러 명이 동시에 입학하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인근에 사는 6명의 할머니에게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서 공부해 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들도 “노인 여럿이 학교 다니면 재미있겠다”며 반겼다. 학교 측도 할머니의 집단 입학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초등학교 신입생 할머니들은 가정사정 등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한글을 아예 모르거나 자신의 이름 정도만 쓸 줄 아는 처지였다.



 남 할머니는 “늦게나마 배움의 길이 열린 만큼 열심히 해 중학교에도 진학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고령인 정 할머니는 “배움의 길을 열어 준 학교에 감사한다”며 “초등학교 과정을 꼭 마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학교 측은 할머니들에게 별도의 맞춤형 교과 과정을 만들어 가르치기로 했다. 어린이와 똑같은 교육 과정을 밟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다음 달부터는 사물놀이 등 방과후 수업도 한다. 박 교사는 “신입생들이 어머니와 비슷한 연세여서 조심스럽다”며 “어르신들 덕분에 폐교 위기에 몰린 학교에 활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인구 2628명인 고전면의 고전초등학교는 1929년 개교해 올해까지 졸업생 3860명을 배출했다. 할머니 7명을 포함해 전교생 34명이 재학 중이다.



황선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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