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BC 대표선수들 ‘야구와 나’

중앙일보 2013.03.02 00:23 종합 6면 지면보기
야구는 기록 경기지만 숫자가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더 많다. 스토리가 쌓여 역사가 되고, 가볍게 웃어넘긴 이야기들이 복선이 된다. 단편이 모여 대하 드라마로 연결된다. 대한민국 스포츠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프로야구가 2일 시작된 제3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통해 세계무대를 향한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2012년 성적, 그리고 기록에는 없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하남직 기자



◆정근우(31·SK)



▶타율 0.266 ▶8 홈런 ▶46 타점 ▶22 도루



정근우는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팀 훈련을 마친 뒤 자신의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담배 한 보루를 건네며 잠겨 있는 옥상문을 열었다. 정근우는 “야간 개인훈련을 하면서 어깨에 힘부터 뺐다”고 했다. 기술적이자 심리적인 처방이었다. 작은 키를 극복한 악바리 근성이 최고다. 최정상 2루수로 올라선 뒤로는 여유 있게 상황을 보는 시야도 생겼다.



◆이용규(28·KIA)



▶타율 0.283 ▶2 홈런 ▶37 타점 ▶44도루



2010년 8월 29일 광주구장. 넥센 사이드암 박준수는 연방 땀을 훔쳤다. 박준수는 20번째 공에 이용규를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범타로 끝났지만 프로야구 사상 가장 길고 끈질긴 승부였다. ‘이용규는 수염 빼고 다 커트한다’는 말도 나왔다. 이용규는 지난해 타석당 투구 수 4.1개, 2011년에는 4.3개를 기록했다. 콘택트 능력과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다.



◆ 최정(26·SK)



▶ 타율 0.300 ▶26홈런 ▶84타점 ▶20도루



“안 돼! 내 공, 내 공!” 최정은 꿈속에서도 야구를 생각한다. 원정 룸메이트 정근우는 “최정의 ‘야구 잠꼬대’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최정은 동료들도 인정하는 ‘야구 천재’. 하지만 만족하는 법이 없다. 2007년에는 수비 훈련 때 실책성 플레이를 한 뒤 분에 못이겨 화장실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선배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 진갑용(39·삼성)



▶타율 0.307 ▶6홈런 ▶57타점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 3-2로 앞선 9회 말 1사 만루. 포수 강민호가 퇴장을 당했다. 오른 햄스트링 부상 중이던 진갑용이 말없이 포수 장비를 찼다. 베테랑의 투혼 덕분에 한숨을 돌린 김경문 대표팀 감독은 투수교체를 고민했다. 진갑용은 지체 없이 “정대현의 공이 좋다”고 추천했다. 정대현과 진갑용은 구리엘을 유격수 앞 병살타로 처리했다.



◆ 손아섭(25·롯데)



▶타율 0.314 ▶5홈런 ▶58타점 ▶158안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2012년 7월 7일 사직구장에서 손아섭이 잠시 머뭇거렸다. “제가 최다 안타 2위거든요. 시즌 시작 전 박정태 코치님과 최다 안타 1위를 약속했어요.” 당시까지 손아섭은 84안타로 90안타의 이승엽에 6개 뒤져 있었다. 비밀을 공개한 손아섭은 매섭게 안타를 몰아쳤고, 결국 최다 안타 타이틀을 차지했다. WBC 출전도 그가 가슴 속에 품어온 목표였다.



◆ 장원삼(30·삼성)



▶17승6패 ▶평균자책점 3.55



2012년 4월 17일 잠실 두산전. 장원삼은 1이닝 6피안타·8실점을 기록했다. 장원삼은 “맞기 시작하니까 오기만 생기더라”고 떠올렸다. 장원삼은 “낙천적인 성격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철저히 준비해야 살 수 있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정신이 번쩍 들자 제구력이 살아났다. 타자들은 꼼짝없이 당하기만 했다. 장원삼은 생애 첫 타이틀(다승왕)을 차지했다.



◆ 오승환(31·삼성)



▶2승1패37세이브 ▶평균자책점 1.94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강문길 당시 단국대 감독은 지독하게 재활훈련을 하는 오승환을 뜯어말렸다. “네”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고 오승환은 다시 뛰었다. 2001년 11월 오른 팔꿈치 수술을 받은 그는 두려움과 싸웠다. 매일 12시간씩 훈련하며 야구를 다시 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잊으려 했다. 독한 훈련이 오승환의 강한 팔과 단단한 심장을 만들었다.



◆ 김현수(25·두산)



▶타율 0.291 ▶7홈런 ▶65타점



이승엽은 김현수를 마주칠 때마다 “천재” 혹은 “타격기계”라고 부른다. 만 스무 살이던 2008년 타격왕에 오른 후배의 재능을 탐내서다. 이때마다 김현수의 가슴에 불이 솟는다. 김현수는 “가진 자의 여유다. 내가 타율 4할을 치면 모를까. 승엽이 형한테 안 된다. 홈런왕이 날 놀리는 기분이다. 나도 스파이더맨 옷(단타자) 말고, 헐크 옷(장거리 타자) 입어야지!”라고 외쳤다.



◆ 강민호(28·롯데)



▶ 타율 0.273 ▶19홈런 ▶66타점



강민호는 경기 시작 전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 심장 근처를 두드린다. 홈런을 때린 뒤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렇게 그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과 환희가 넘치는 상황에서 2006년 세상을 떠난 죽마고우 고상범씨를 떠올린다. 강민호는 “유치원 때부터 같이 야구를 한 친구다. 난 지금도 그와 함께다”라고 했다. 야구할 때 그는 누구보다 진지하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