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승4패 전쟁같은 한·일전…한대화의 기적, 다시한번

중앙일보 2013.03.02 00:06 종합 8면 지면보기
2006년 WBC 한국 대표팀 이종범이 미국 애너하임구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2라운드 경기에서 8회 초 2타점 결승타를 때린 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2-1로 역전승한 대표팀은 준결승에 진출했다. [중앙포토]


“아이고. 또 그 얘기야? 그때 말이야. 몸 중심이 하체에 남아 있었어. 그래서 타구가 휘지 않고….”

WBC 영원한 라이벌 한국·일본



 한대화(53) KIA 2군 감독은 ‘그때 그 홈런’에 대한 질문을 아직도 받는다. 처음 만난 기자에게서도, 포장마차의 옆 손님에게서도 1982년 9월 14일 얘기를 듣는다. 제27회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우승 결정전에서 비쩍 마른 안경잡이 타자가 터뜨린 8회 역전 스리런 홈런은 아직도 한국인 가슴속을 비행하고 있다. 이후 한대화는 해태와 LG의 4번타자로 활약했고, 지난해까지 한화 감독을 지냈지만 올드팬들 가슴을 오랫동안 울린 건 잠실구장 왼쪽 파울폴을 때린 그 한 방이었다.



 “아, 그건 사인 미스가 아니었다니까. 내 판단으로 번트를 댄 거라고. 나도 모르게 몸을 붕 날렸어.”



 한대화의 홈런이 터지기 직전엔 김재박(59) 전 LG 감독의 ‘개구리 번트’가 있었다. 1-2로 뒤진 1사 3루에서 일본 배터리가 번트를 예상하고 공을 바깥쪽으로 뺐다. 순간 김재박은 펄쩍 뛰어 멀리 달아나는 공에 방망이를 맞혀 동점을 만들었다. 이 묘기 같은 번트는 어우홍 당시 감독의 사인을 김재박이 잘못 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재박은 아직도 이를 부정한다. 명유격수였고 현대를 네 차례나 우승시킨 감독이었지만 김재박 최고의 순간은 역시 개구리처럼 날아올랐을 때다.



 한국 프로야구는 82년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시작했다. 한국 야구는 일본을 배우고, 일본을 넘어서려는 과정을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세계인의 야구축제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결과적으로 한·일전의 확대판이었다. 일본이 2006·2009년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한국은 일본과 명승부를 벌인 끝에 4강, 준우승을 각각 차지했다. WBC에서 두 팀 전적은 4승 4패. 2일 시작된 제3회 WBC도 결국 한·일전이 핵심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50년대부터 국제대회에서 맞붙기 시작했다. 일본이 이미 프로야구를 시작했을 때였고, 한국은 동네야구를 막 벗어나려는 참이었다. 82년 홈에서 열리는 대회를 위해 한국은 김시진·장효조 등 아마추어 최고 선수들의 프로 입단을 미루도록 했다. 기적 같은 역전 우승은 축구로 대변된 한·일전의 재미를 야구로 끌고 왔다. 그러나 한 경기를 이겼다고 양국의 수준 차가 확 좁혀질 순 없었다. 90년부터 프로 올스타가 나선 한·일 슈퍼게임에서 한국은 5승3무8패로 밀렸다. 전적 차이보다 실제 기량 차는 더 컸다. 한국은 프로야구 최고 선수들이 나섰지만 일본은 정예 선수들과 1.5군 선수들을 모아 맞섰다. 96년 ‘국보 투수’ 선동열(주니치)을 시작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실패 사례가 더 많았다. 한국이 한 수 아래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국제야구연맹(IBAF)은 90년대 후반 프로 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을 허용했다. 한·일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한국은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프로 올스타로 구성된 드림팀을 꾸렸다. LA 다저스에서 활약했던 박찬호도 대표팀에 합류,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된 일본을 결승에서 13-1로 눌렀다. 충격을 받은 일본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프로 선수들을 내보냈다. 한국은 예선전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을 연파했다. ‘일본 킬러’ 구대성의 호투와 ‘국민타자’ 이승엽의 한 방 덕분이었다.



 한국 야구는 이후 성장통을 앓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과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은 물론 대만에까지 졌다. 선수층이 두터운 일본과 달리 몇몇 엘리트 선수에게만 의존한 한국은 대표팀 구성에 따라 전력 차가 컸다.



 정예 멤버가 제대로 맞붙은 한·일전은 WBC에서 열렸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축구의 월드컵과 같은 국제대회를 만들기 위해 2006년 WBC를 출범했다. 1회 WBC에서 한국은 박찬호·김병현·서재응(이상 메이저리그)·이승엽(일본 요미우리)까지 불렀고, 일본도 스즈키 이치로와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빅리거들을 소집했다. 이치로는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 야구를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한·일전은 뜨겁고, 또 아팠다. 한국은 1·2라운드에서 일본을 연파했다. 이승엽은 홈런을 쳤고, 이종범은 안타를 때렸으며 박찬호가 이치로를 막았다. 그러나 불합리한 대회 방식 때문에 한국은 준결승에서 일본과 세 번째 대결을 펼쳐야 했다. 한국은 경기 후반을 버티지 못해 0-6으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일본은 결승에서 쿠바를 꺾고 WBC 초대 우승컵을 품었다. 한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을 두 차례나 꺾고 금메달을 따냈다. 이때는 일본의 메이저리거들이 빠졌다.



 2009년 2회 WBC에서 한·일전이 무려 5차례나 열렸다. 2라운드까지 2승2패를 기록한 뒤 결승전에서 마지막 대결이 벌어졌다. 한국과 일본의 기세에 메이저리거들로 이뤄진 미국·베네수엘라가 탈락했다. 결승전에서 한국은 2-3으로 뒤진 9회 말 이범호의 동점타로 승부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다.



 연장 10회 일본 대표팀의 리더 이치로는 한국 마무리 임창용과 8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2타점 결승타를 때렸다. 3-5 패배. 한국 야구는 극일(克日)을, 세계 정상을 눈앞에서 놓쳤다.



 82년 이후 프로선수들이 참가한 한·일전 전적에서 한국은 18승20패로 뒤진다. 정예 멤버를 꾸려 승부를 벌이면 일본을 이기다가 경기를 거듭할수록,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약한 체력이 드러났다. 고등학교 야구팀이 50여 개인 한국 야구와 4000개가 넘는 일본 야구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베테랑 선수들은 여전히 일본을 어려워하지만 일본을 자주 이겨본 젊은 선수들은 또 다르다. 앞선 두 차례 WBC에서 일본전을 치러본 이들은 자신감에 차 있다. 양국은 도쿄돔에서 열리는 2라운드에서 만날 가능성이 크다. 2회 대회 때처럼 또다시 나란히 결승에 오른다면 한·일전은 최대 세 번까지 열릴 수 있다.



 이번 대회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메이저리거가 불참한다. 3회 WBC 결과에 따라 한국 리그와 일본 리그의 수준을 겨뤄볼 수 있다.



김효경 기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