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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너무 바쁘니 애들이 스스로 공부했네요

중앙일보 2013.02.27 03:30 강남통신 6면 지면보기
사진=김경록 기자


그땐 몰랐다. 이제야 알겠다. 서른일곱이 참 어린 나이라는 걸.

일·자녀교육 두 마리 토끼 잡은 국립발레단장 최태지



 최태지(54) 국립발레단장은 1996년 그 어린 나이에 국립발레단장이 됐다. 국립발레단은 물론 국립극장 역사상 최연소 단장이었다. 당시 같이 임명된 국립극장 산하 다른 단체장은 모두 최 단장보다 많게는 서른두 살에서, 적게는 열한 살이나 많은 어른들이었다. 당장 “연륜이 짧다”는 수군거림이 나왔다. 그러나 초등학생 때부터 서른네 살까지 춤만 추던 혀 짧은(최 단장은 재일교포 2세라 한국말 발음이 좀 어색하다) 발레리나 출신 지도위원이 국립발레단장에 오른 지 1년도 채 안 돼 안팎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역시 의욕 있는 젊은 사람이 들어오니 국립발레단이 확 바뀌는구먼….”



 공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최 단장은 모든 걸 바꿔 나갔다. 토슈즈를 벗어 던진 그는 하이힐을 신고 정말 열심히 뛰었다. 2001년까지 6년 연속으로 국립발레단장을 맡는 동안 발레를 대중화해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해설이 있는 발레’를 처음 도입한 게 바로 최 단장이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해 오히려 식상할 정도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였다. 여전히 최고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프리마 발레리나 김지영을 확고부동한 스타로 키워낸 것도,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러시아·프랑스 발레단과의 교류로 레퍼토리를 넓힌 것도 다 마흔 언저리의 최 단장이 한 일이다.



 2002년 초 국립발레단을 떠난 최 단장은 2004년 정동극장장을 거쳐 2007년 말 다시 국립발레단장으로 돌아왔다. “스타의 귀환”이라는 표현이 그를 따라왔다. 그만큼 그의 공백이 컸다는 얘기다. 그리고 2010년 말, 또 다시 연임에 성공했다. 통틀어 4연임 장기 집권에 들어간 것이다. “누구를 뽑느냐가 아니라, 최태지인가 아닌가”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다던 당시 인사에서 결국 인사권자는 검증된 카드를 다시 뽑아 든 셈이다. 그리고 최 단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난해 말 ‘호두까기 인형’ 공연은 무려 102.4%라는 유료 점유율을 기록하며 국립발레단 50년 역사상 최고 판매액을 기록했다.



승승장구 발레 인생?



 최근 십수 년간의 이력을 다시 들춰보면 승승장구라는 표현 외에는 최 단장을 달리 설명할 말이 많지 않다. 일뿐 만이 아니다. 엄마에 이어 발레를 전공한 큰딸 리나(27)씨는 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에 입단해 5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예술사와 러시아어를 복수 전공하고 있다. 미 뉴욕대에서 경제학과 프랑스어를 전공하는 작은딸 세나(24)씨는 5월 졸업한다. 한국에 돌아와 1~2년 사회생활을 한 후 공부를 더 하겠다는 계획이다. “엄마 정보력 없이는 대학 못 보낸다”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전문직 엄마가 전업주부도 두기 어려운 ‘엄친딸’(모든 걸 다 잘하는 엄마 친구 딸)을 도대체 어떻게 둔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불평이 주변에서 나올 만하다. 잡기 어렵다는 일과 양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으니 말이다.



 시계를 다시 돌려 2002년. “행정 경험 없는 어린애가 국립 단체를 맡아서 뭘 제대로 하겠어”라는 경시가 “일 똑 부러지게 잘한다”는 찬사로, 찬사가 다시 “로비로 컸다”(최 단장 특유의 친화력은 종종 로비로 폄하되기도 한다)는 식의 질시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단장은 2002년 초 쫓겨나다시피 국립발레단에서 나온 뒤 2004년 정동극장장으로 복귀할 때까지 활동이 뜸했다. 언론은 이 시기를 ‘와신상담’ ‘절치부심’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실은 남 모를 속사정이 있었다. 남편과의 별거, 그리고 이혼이라는 아픔을 이때 겪었다. 틈날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일에 더 몰두해 가정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결국 이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여성에 장벽 높지만



여풍(女風)이 거세다는 지금도 조직을 책임지는 자리에선 여자를 찾기 어렵다. 여자라는 사실은 많은 자리에서 여전히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하물며 여자가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 역할을 하나씩 더해가면 조직 내에서의 어려움은 배가된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이혼과 재혼을 겪고도 전무후무한 4연임의 기록을 세울 땐 얼마나 능력을 인정받았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은 결코 가늠하기 어려운 게 그 모든 과정을 겪으며 받았을 상처의 크기다. 세 쌍에 한 쌍꼴로 이혼한다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아픔이, 충격이 예전보다 쪼그라드는 건 아니다. 이혼 가정 하나하나마다 남모르는 상처가 있다. 그건 최 단장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임준호(56·인하대 로스쿨 교수) 변호사와 재혼해 다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그땐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이혼은 무슨 죄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랑도 아니다. 게다가 두 딸을 둔 엄마라면 더욱 꺼내기 어렵고 조심스러운 얘기다. 그러나 비슷한 아픔을 겪는 가족을 위해 최 단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빠를 사랑한 두 딸을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해주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또 이혼 후에 어떻게 두 아이를 반듯하게 잘 키웠는지 말이다.



최태지 단장(가운데)과 두 딸.
반듯하게 큰 두 딸



-이혼할 때 아이들 충격이 컸겠다.



 “엄마 아빠가 같이 살 수 없다는 현실에 애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다. 아빠한테도 많이 사랑 받던 아이들이니까. 그 눈물을 보면서 애들한테 너무 미안했다. 이혼할 때는 ‘내가 강하게 살아야 애를 키울 수 있지’라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라 아이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애들 마음을 열려고 어떤 노력을 했나.



 “아무리 바빠도 같이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했다. 애들 마음 안 다치게 하려고 예전 같으면 엄격하게 혼낼 일도 그냥 웃고 넘어갔다. 아무리 함부로 말해도 참았다. 그러느라 나도 많이 울었다.”



-어떤 말이 가장 아프던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 아니냐고, 엄마가 가정을 위해 더 헌신했더라면 아빠랑 관계도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도망갔느냐고 그러더라. 애의 분노를 알기에 참았다. 한번은 ‘엄마는 왜 나를 똑바로 혼내지도 못하느냐’고 소리치더라.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서로 너무 아프다 보니 그러지 못했다. 애 입장에선 당당하지 못한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싫은 모양이더라.”



-엇나가는 애들도 많은데 참 잘 컸다.



 “사실 큰딸은 유학 중이라 오히려 좀 나은 편이었다. 둘째가 딱 사춘기에 접어들 때라 많이 힘들어했다. 한동안 힘들어한 후 ‘부모 이혼하더니 정신 못 차린다’는 소리는 듣기 싫다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더욱 올바로 살겠다’고 말하더라. 중학교 2학년 때 유학 가겠다고 해서 캐나다로 보냈다. 방학 때마다 집에 와서도 나한테 학원 알아봐 달라고 하면서 스스로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한국에 아무 인맥도 없고 예술계에만 있다 보니 사교육 정보에 관해선 완전히 무지했다. 딸한테 ‘엄마는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타박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애들 어릴 적 친구 엄마들한테 부탁해서 정보를 얻었다.”



-큰딸은 발레를 했으니 많이 도와줬겠다.



 “정반대다. 예원학교 다닐 때 ‘단장 딸’이라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편한 데서 교육시키자고 해 진작에 캐나다로 유학 보냈다. 엄마랑 같은 일을 하면 더 많이 챙겨줄 수 있을 것 같지만 똑같은 길을 걸으니 오히려 더 마음 아픈 일이 많더라. 졸업 후에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러시아로 보냈다. 둘째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발레를 했다. 6학년 되자마자 스스로 안 한다고 하더라.”



-재혼 가정이 또다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은데 화목해 보인다.



 “애들은 처음에 헤어진 사실보다 재혼한 사실을 더 받아들이지 못하더라. 지금은 애들이 먼저 새아버지 안부를 물을 정도로 한 가족이 됐다. 그 점에서 지금 남편에게 고맙다.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줬다. 살면서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때마다 남편은 애들에게 계속 다독였다.”



-딸들이 어떤 인생을 살기 바라나.



 “내가 못 그래서인지 우리 애들이 자기 애 낳으면 가정에 충실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애들은 아빠가 암만 잘해도 아빠 아닌 엄마를 찾지 않나.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사는 게 간편해졌다 해도 사람 사이의 관계나 가정 문제에선 엄마는 어디 도망갈 데가 없다. 만약 나처럼 사회생활을 한다면 내가 할머니가 돼서 애들한테 엄마 노릇 잘 못해준 걸 다 갚아주고 싶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을 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가 줬을 거란 생각도 한다. 어떤 힘든 일도 스스로 책임지는 자립심을 키웠을 거라 믿고 싶다.”



발레 꿈나무들을 위한 조언

“콩쿠르 입상이 전부는 아니야…
하고자 하는 정신력이 더 중요”




최태지 단장은 발레리나로서 드문 경력을 지녔다.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에서 활약하다 프랑스·미국으로 발레 유학을 떠난 것까지는 별로 특이할 게 없다. 그런데 미국 조프리 발레스쿨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85년 한 살 연하의 첫 남편과 즉흥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는 첫딸을 갖자마자 곧 무대를 떠났다. 그러나 발레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몸을 만들어 87년 국립발레단에 정식 입단했다. 95년까지 수석무용수로 무대에 섰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장벽도 그가 춤추는 걸 막지 못한 셈이다. 뭐가 그렇게 매력적이기에 발레를 놓지 못한 것인지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좀 과장하자면 어린 여자애들은 누구나 발레리나를 꿈꾼다. 좋은 발레리나가 되려면 뭐가 가장 필요한가.



 “우선 본인이 뭘 하고 싶은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취미인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진짜 발레리나가 되길 원하는지 말이다. 정말 발레리나를 하고 싶은 거라면 발레리나의 최종 목적이 뭘까를 고민해야 한다. 나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콩쿠르 수상 등 소위 스펙 만들기에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인생을 길게 보면 좋겠다.”



-실력 있는 발레리나가 상을 타는 게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세계적 콩쿠르는 물론 그렇다. 하지만 국내 콩쿠르는 꼭 그렇진 않다. 여기서 상 타고 우쭐해 자신을 잊는 경우도 많다. 이력서 한 줄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콩쿠르 수상이 프로페셔널로 오래 살아남기 위한 전제조건은 결코 아니다. 콩쿠르에서 상 타면 뭔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계적 발레단은 작품에 맞는 사람을 택하지 콩쿠르 경력만 보고 뽑지 않는다. 발레를 시키는 부모에게도 꼭 말해 주고 싶다. 너무 어릴 때부터 조바심 내고 경쟁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어릴 때는 재능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테크닉을 얼마나 익히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부모가 가장 챙겨야 할 게 뭔가.



 “좋은 선생을 찾아주는 거다. 세계적으로 훌륭한 발레리나의 자서전을 보면 공통적으로 발레리나의 어머니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최고의 선생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때도 생각할 게 있다. 발레 전공 후 교수를 시키고 싶다면 현재 교수한테, 그게 아니라 무대에 서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면 현직 무용수를 찾아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강수진이나 김지영 같은, 발레단 생활을 오래 한 그런 사람들 말이다. 성공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중요하다.”



-누구나 만나고 싶겠지. 하지만 만나는 게 어디 쉽나. 하물며 스승이라니.



 “정말 노력하면 안 만나 줄 사람 없다. 물론 그전에 될 재목인지 파악해야겠지. 그냥 취미로 하는 거라면 동네 학원이면 충분하다.”



-좋은 발레리나가 되기 위한 조건은 뭔가.



 “신체조건은 기본이다. 그 다음은 정신력과 음악적 감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력이다. 난 개인적으로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아무리 예쁜 몸매와 재능이 있어도 선생의 말을 못 받아들이면 거기서 성장이 멈춘다. 부모는 전문가의 솔직한 얘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학을 가야 할까.



 “한국에 있는 선생 가운데서 세계 유수 발레단에서 배워 온 사람도 많다. 국내에서도 할 수 있다. 다만 발레는 우리 고유 무용이 아니니까 한계는 있다. 방학이라도 나가서 교류하면서 배울 필요가 있다.”



최태지

1959년 54세

일본 교토 생

국립발레단 예술감독·단장

세계무용센터 이사

모나코 댄스포럼 자문위원

예술의전당 이사

1968~80년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

1981년 분카 가쿠인대 불문학과 졸

1987~95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지도위원

1996~2001년 국립발레단장 겸 예술감독

2004~2007년 정동극장장

2008년~ 국립발레단장



사는 곳: 한남동 하이페리온

근무하는 곳: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운동하는 곳: 전홍조 아트필라테스

장 보는 곳: 청담동 SSG와 성수동 이마트

가족: 남편 임준호 변호사와 2녀

자주 가는 식당: 청담동 ‘테이스팅룸’ ‘퀸즈파크’ ,‘토담골’ ‘새벽집’

자녀

큰딸: 숭의초등학교→캐나다 국립발레학교→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토론토 대학

작은딸: 숭의초등학교→신사중학교→몬트리올 스탠스테드 칼리지(보딩스쿨)→서울국제학교→뉴욕대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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