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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10) 4·3 진상규명위원회

중앙일보 2013.02.25 00:44 종합 10면 지면보기
2003년 4월 3일 제주시 4·3 평화공원에서 4·3사건 위령제가 열렸다. 왼쪽부터 우근민 제주도지사, 고건 국무총리,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사진 한라일보]


“뭐, 이런 회의가 다 있어요?”

제주 4·3 추모식 가는 길 돌우박이 쏟아졌다



 2003년 3월 21일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초안에 대해 토론하는 회의 자리. 분위기는 초반부터 심상치 않았다.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 기획단장은 지금의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였다. 박 단장이 초안을 읽어나가자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나왔다. 유보선 국방부 차관, 김점곤 경희대 명예교수 등이 소리치며 불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나치게 과잉 진압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내용에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보수와 군경 측 인사들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아예 회의장을 떠나려 했다.



진보단체와 피해자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상 규명 취지와 다르게 국방부가 지나치게 군 입장만 강조하고 있어요!”



 회의의 주재는 국무총리로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내 몫이었다. 나가려는 위원들을 간신히 붙들어 앉힌 다음 말했다.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해서 조정할 건 조정하겠습니다. 저를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어 여러분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반영하겠습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 조영길 국방부 장관과 민간의 중립적 학자·전문가를 소위원회에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하며 겨우 상황을 수습했다.



김점곤(90) 경희대 명예교수.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다 중간에 사퇴했다.
 총리가 되자마자 큰 과제를 떠안았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유족은 군경에 의해 가족이 희생됐다는 이유만으로 연좌제에 얽매였었다. 당국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도 제약을 받아야 했다. 위원회에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엄중한 숙제가 떨어졌다.



 이후 내가 직접 세 차례 소위원회를 개최했다. 의견 대립은 격렬했다. 557쪽 길이의 진상보고서 가운데 30여 건, 100여 쪽 내용을 수정해야 했다. 그리고 3월 29일 7차 위원회 회의를 개최했다. 김점곤 교수는 전날 위원직 사퇴서를 내고 참여하지 않았다.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도 개인적 이유로 불참해 총 18명의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상보고서를 조건부로 채택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 보고서는 이렇게 ‘두 개의 사실’로 정리됐다.



 보고서를 최종 채택하는 시기는 6개월 후로 미뤘다. 내 아이디어였다. 보고서를 공개한 뒤 제기되는 새로운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내용을 수정하거나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대립하고 있는 두 시각을 하나로 수렴하는 일이다. 신중해야 했다.



 그런데 4월 1일 추미애 민주당 의원이 성명을 냈다. “총리가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진상조사의 결실을 훼손하거나 왜곡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그 의도를 경계한다.” 보고서 최종 채택 시기를 6개월 늘린 것을 문제 삼았다. 바로 위원회 명의로 “6개월 시한부 수정 의견은 위원 전원 동의하에 나온 것”이란 반박 자료를 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조건부 채택이긴 했지만 진상보고서가 나왔다는 사실을 흔쾌히 여겼다. 위원회 민간위원들을 불러 청와대에서 오찬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은 남아 있었다. 4월 3일 제주 4·3사건 55주년 추모 기념식이 제주도에서 열렸다. 진상보고서 최종 채택이 6개월 연장됐기 때문에 노 대통령은 내려가지 않고 대신 내가 참석했다. 국도에서 식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차가 섰다. 경찰이 안내했다.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시면 되겠습니다.”



 식장까지 걸어서 1㎞ 남짓 꽤 먼 거리였지만 맞는 의견이다 싶었다. 추모하는 자리니 차를 타고 식장까지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게 100m쯤 걸어가니 뭐가 휙 하니 날아왔다. 돌이었다. 길 옆 야트막하게 솟은 언덕에 시위대가 숨어 있었다. 진상보고서 최종 채택을 6개월 연기한 것을 두고 반발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의 소행이었다. 그렇게 돌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씌워준 방패 너머로 돌이 부딪히는 ‘퉁탕퉁탕’ 소리가 울렸다. 방패로 간신히 피하며 걸어갔다.



 다치진 않았지만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길 주변은 집 한 채 없이 밭만 펼쳐져 있었다. 지나가던 시위대가 우연히 나를 보고 돌을 던졌을 리 없었다. 내가 그 길로 걸어간다는 정보를 미리 빼내 계획했던 게 분명했다. 경찰과 시민단체 사람들이 짜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의심을 전부 떨쳐버리지 못했다. 제주 4·3사건 추모 기념식에 현직 총리가 참석한 것이 처음인데 돌우박은 심하다 싶었다. 다행히 추모식장 안은 환영 분위기였다.



 그 후 6개월 유예 기간 중에 20여 기관·단체·개인으로부터 376건에 달하는 수정 의견이 쏟아졌다. 여기서 추려 33건 내용을 고쳤다. 10월 15일 진상보고서가 최종 채택됐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제주도를 찾아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국가권력의 잘못”이라고 제주 4·3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제주 4·3사건은 한국의 아픈 역사다. 극명한 대립은 사그라졌다 해도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이다. 역사인 만큼 열린 결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나는 진상보고서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 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 회복에 중점을 둬 작성됐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사건



제주 4·3 사건



1947년 3월 1일 3·1절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 선거에 반대해 관공서를 습격했다. 이를 주도한 김달삼이 그해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려고 제주도를 탈출한다.



 군경이 이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진압하는 작전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희생된다. 특히 군 9연대의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 이어 2연대의 ‘북촌 사건’의 경우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비극적 사건으로 꼽힌다. 48년 4월 3일부터 54년 9월 21일까지 6년여 동안 수많은 제주 양민이 죽었다.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4028명이지만 여러 사료와 인구 변동 통계를 감안하면 실제 인원은 2만5000~3만 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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