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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대일관계엔 포커페이스가 정답

중앙일보 2013.02.25 00:30 종합 33면 지면보기
서승욱
도쿄 특파원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제멋대로 정한 ‘다케시마(竹島)의 날’인 22일. 시마네현 해안도시 마쓰에(松江)는 일본 우익 인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욱일승천기가 그려진 우익 버스들은 확성기를 매단 채 쉴 새 없이 행사장 주변을 맴돌았다. 깍두기 머리를 한 조폭 우익, 일상의 스트레스를 욕으로 푸는 듯한 30대 우익 여성들의 말은 거칠었다. “바퀴벌레, 도둑X” “X새끼”…. 이제 귀에 익숙해진 한국말 반 일본말 반의 욕설들이다.



 욕을 하러 한국어를 공부하는 열성파를 비롯해 각양각색의 우익들이 몰려들었지만 수준 이하 퍼포먼스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목소리 큰 우익들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전반적인 일본 내 분위기다.



 영토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며 많은 일본 국민과 언론이 마쓰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불을 당긴 사람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다. 일본 언론들이 ‘기막힌 묘수’로 치켜세우는 일본 정무관(차관보) 파견에 기념식장 분위기도 일순 달아올랐다. 예년의 세 배가 넘는 기자들이 몰리고 “조금 더 힘을 내면 뭔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식장을 지배했다. 아베가 각료와 부대신이 아닌 정무관을 파견하며 힘 조절을 하자 언론들은 “한국을 배려하는 묘수인데도 왜 한국은 민감해하나”라고 보도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맞상대 아베는 이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재수 총리인 그는 쫓겨나듯 물러난 6년 전의 아픔을 기억한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더 치밀하게 머리를 쓴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고노 담화 철회 공약으로 총선을 이겼지만,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는 전문가 회의를 통해 돌아갈 줄 안다. 향후 더 교묘한 수법과 꼼수가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개념조차 모호한 우애정신을 강조하며 한국에 손을 내밀었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처럼 순진했던 몇몇 전 총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작년부터 급속히 악화된 양국 관계엔 우경화된 일본 측 책임과 함께 한국 정부의 혼란스러운 언동이 한몫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선 직후 “이제는 일본에 ‘사과하라, 반성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던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말 일왕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자 일본은 “지일파 대통령이 얼굴을 바꿨다”고 흥분했다.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빨리 달궈졌다 빨리 식기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한 외교정책, 섣불리 ‘지일파’나 ‘반일파’로 규정되지 않는 포커페이스와 돌직구가 새 대통령에게 필요할 것 같다.



서 승 욱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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