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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파시스트’ 도조 내각 개전 결정 … 日, 진주만 기습

중앙선데이 2013.02.24 02:23 311호 30면 지면보기
1943년 12월 7일(미국시간) 하와이 진주만 습격 때 격침된 오클라호마호의 잔해. [사진가 권태균]
1941년 4월 13일 오후 5시 모스크바역. 스탈린과 외무상 모로토프가 일본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A급 전범으로 재판 중 병사)를 배웅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스탈린은 마쓰오카에게 “우리는 아시아인”이라고 속삭였고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기독교도였던 ‘민간 파시스트’ 마쓰오카는 이제 마음 놓고 남방으로 진출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쓰오카는 이날 5년 기한의 ‘소·일(蘇日)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소·일 중립조약’ 제1조는 “양국 영토의 보전 및 불가침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는데, 조약 체결 직후 스탈린은 일본 무관(武官)에게 “일본은 이제 안심하고 남진할 수 있겠군”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⑧ 대미 개전론 공방


 스탈린은 1939년 8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히틀러를 믿지 않았다. 스탈린은 독일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본을 묶어두기 위해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 후인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이번에도 히틀러는 동맹국인 일본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한 뒤 영웅 대접을 받았던 마쓰오카는 독일의 소련 침공 소식을 듣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6월 27일 열린 대본영(大本營) 회의에서 느닷없이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오히려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참모총장이 “지금 당장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발을 뺐다. 중국전선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노몬한에서 크게 혼쭐난 소련까지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미·영(美英) 선제공격론이었다. 미·영 선제공격론은 누가 봐도 무리한 주장이었다. 현대전은 군사전일 뿐만 아니라 경제전쟁이기도 했다. 1941년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7500만t, 영국은 1250만t인 데 비해 일본은 700만t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네 차례의 어전회의를 열어 대미 개전을 논의했다. 1차는 7월 2일, 2차는 9월 6일, 3차는 11월 5일, 4차는 12월 1일이었다. 1차, 2차 어전회의 때는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가 수상이었고, 3차 어전회의 때부터는 새로 수상이 된 군부 파시스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수상이었다.

1 진주만의 건조도크에 있는 펜실베니아호, 앞에 있는 구축함은 다운스호와 캇신호. 2 ‘진주만 공격에 보복하자’는 내용의 미국 포스터.
대미 회담 물밑으로 전쟁 준비 착착
제1차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와 고노에는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지나사변(중일전쟁) 처리에 매진하고… 남방진출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또 정세의 추이에 따라 북방문제를 해결한다… 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영·미전도 그만둘 수 없다”고 결정했다. 한마디로 수퍼맨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중일전쟁은 계속하고 상황에 따라 북방의 소련도 공격하고 남방의 미·영과도 맞붙겠다는 뜻이었다.

 2차 어전회의 하루 전날 히로히토는 스기야마 참모총장과 나가노 군령부총장 등을 불러 ‘미국과 전쟁하면 육군은 어느 정도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라고 물었다. 스기야마가 ‘남쪽 방면만 한다면 3개월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자 히로히토는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 때 육군대신이었던 자네는 1개월 정도면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4년이나 끌었는데도 아직 정리가 안 되지 않았는가?’라고 재차 물었다.

 스기야마는 ‘지나(중국)는 오지가 넓어서 예상과 달리 작전이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히로히토는 ‘태평양은 더 넓지 않은가? 무슨 확신으로 3개월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또다시 물었고 스기야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전후에 자신의 전쟁 책임을 군부에 떠넘기기 위해 쓴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날짜 육군 대본영 기밀일지에는 ‘약간 긴장감이 돌긴 했지만 어전회의에 대해서 두 총장(스기야마와 나가노 군령부총장)의 답변을 듣고 천황이 가납했기에 모두 안도했다’고 적고 있다. 만주사변 이후 패전 때까지 일왕 히로히토는 기회주의로 일관했다.

 고노에 내각의 서기관장(書記官長)이었다가 패전 후 자민당 의원이 된 도미타 겐지(富田健治)는 히로히토에 대해 “(대미)전쟁에 반대하셨지만 때로는 약간씩 개전 쪽으로 가까워진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중국과 동남아 침략에 대해 미국이 강경하게 원상회복을 요구하자 일본은 두 방면으로 대처했다. 미국과 양해안 체결을 위한 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물밑으론 전쟁 준비에 나섰다. 미·일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①모든 나라의 영토와 주권 존중 ②내정불간섭 ③모든 나라의 평등원칙 ④태평양의 현상유지’라는 4원칙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물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라는 요구였다.

 1941년 10월 2일 미국은 이 4원칙을 재차 확인하면서 중국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일본은 들끓었다.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A급 전범으로 처형)는 “중국 철병은 인간으로 치면 심장이 멎는 것으로서 4년 동안 싸웠던 지나사변의 성과가 제로가 되어 만주국이 위험하게 되고 조선을 국방의 최전선으로 삼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면서 대미 개전(開戰)을 주장했다.

 ‘조선을 국방의 최전선으로 삼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식민지 한국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뜻으로서 일본 제국의 붕괴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연일 승전고를 울리고 있다고 선전하던 중국전선에서 느닷없이 철수하면 만주국과 식민지 한국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란 우려였다. 기세 좋게 중국에 쳐들어갔다가 진짜 실력이 드러나면서 제국 유지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었다.
 대미 개전론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내각이 무너졌는데 10월 18일 그 뒤를 이은 것은 군부 파시스트 도조 히데키 내각이었다. 집단적으로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제4차 어전회의서 대미 개전 결정
미국과 맞대결할 자신이 없었던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는 하와이 선제공격을 주창했다. 야마모토는 ‘수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는데 개전 벽두 항공 병력을 가지고 적 본영에 쳐들어가 다시 재기하기 힘들 정도의 타격을 가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항공모함에 몰래 비행기를 싣고 가서 진주만의 미 태평양 함대를 격멸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11월 13일 각 함대의 장관과 참모장 등을 히로시마(廣島) 부근의 이와쿠니(岩國) 해군항공대로 집결시켜 “12월 ○일 미·영(美·英)에 대한 전단(戰端)을 열 것이다. ○일은 현재로선 12월 8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달했다. 이틀 후인 11월 15일 열린 3차 어전회의에서 ‘12월 1일 0시를 기한으로 대미 교섭을 중단한다’는 이른바 ‘제국국책수행요령’이 결정되었다. 12월 1일까지 대미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11월 26일 미국의 코델 헐(Cordell Hull: 1945년 노벨평화상 수상) 국무장관은 ‘헐 노트’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 정권만을 인정, 미·일 양국 정부는 중국에서 일체의 치외법권 포기, 제3국과 체결한 협정을 태평양 지역의 평화유지와 충돌하는 방향으로 발동하지 않을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전으로 아시아를 되돌리라는 요구였다.

 특히 중국 철수 요구는 일제가 세운 왕조명(汪兆銘:왕정위) 괴뢰정권은 물론 부의(溥儀)의 만주국도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한국을 강제 점령한 1910년 이전으로 되돌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일본의 항복을 요구한 셈이었다.

 12월 1일 열린 4차 어전회의에서 대미 개전 결정이 내려졌고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토는 전군에 “니이타카 산에 올라가라 1208”이라는 암호 명령을 하달했다.

 12월 8일(미국시간 7일)은 미국의 일요일이었다.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1척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는 오전 1시30분 두 차례에 걸쳐 353대의 비행기를 발진시켰다. 선전포고는 공격 한 시간 후에야 전달했다. 일요일 새벽에 무방비로 있다가 급습당한 미국해군항공대는 “진주만이 공격당했다. 이것은 연습이 아니다”라는 경보를 발표했다.

 일본군 제1진은 애리조나·캘리포니아·웨스트버지니아호 등을 격침시키고 오클라호마호를 전복시켰다. 제2진은 메릴랜드·네바다·테네시·펜실베이니아호에 큰 타격을 입혔고 사망자도 2300명이나 발생했다. 그 밖에도 함선 18척이 침몰되거나 큰 손상을 입었고 180여 대가 넘는 비행기가 파괴되었다.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 3대는 진주만에 없었기 때문에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상·하 양원 합동연설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미국시간)을 ‘치욕의 날(the day of infamy)’로 명명하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일본의 공격은 며칠, 아니 몇 주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면서 ‘일본은 모략을 꾸며 미국을 속였다’고 비난했다. 상원은 82대 0, 하원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도 반대했던 지넷 랭킨만 반대해 388대 1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군은 항상 몰래 습격한 전투만 승리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진주만 습격 소식에 일본 전역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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