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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평생 심복 펑더화이 충성심 의심하기 시작

중앙선데이 2013.02.24 03:05 311호 33면 지면보기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시절인 1951년 6월, 펑더화이가 한국전쟁 휴전회담 장소로 선정된 개성의 래봉장(來鳳莊)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김명호]
5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쫓겨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를 애석해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내용도 “신중국 수립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을 세웠다.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통증이 심했다. 의사가 진통제를 권하면 마오쩌둥의 약은 먹지 않겠다며 호통을 쳤다. 관우와 장비를 합쳐 놓은 사람이었다. 진실을 얘기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는 등 거의 비슷비슷하다. 맞는 말이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0>

마오쩌둥이 등장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흐루쇼프는 죽은 스탈린을 난도질했다. 소련은 스탈린이 없어도 레닌이 있다. 신중국은 마오쩌둥 아니면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다. 펑더화이는 마오의 권위에 도전했다. 비극을 자초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마오쩌둥은 싸움을 즐겼다. 도전을 좋아했고, 누가 도전을 해오면 흔쾌히 받아들였다. 피하기는커녕 얼굴에 생기마저 돌았다. 투쟁철학이 곧 인생철학이었다. “나는 먼저 싸움을 건 적이 없다. 단 나를 먼저 해치려 하는 자는 상대가 누구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 전략도 복잡하지 않았다. 평생 ‘상대가 찧고 까불게 내버려 두고 잠복해 있던 적까지 모습을 드러내면 느지막하게 나서서 일거에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 한 가지만 구사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다들 나가떨어졌다. 여산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9년 7월 14일, 펑더화이가 놓고 간 편지를 본 마오쩌둥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얘기”라며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대신 회의 기간 동안 펑더화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내버려뒀다. “실책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 마오쩌둥 동지를 포함해 책임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인민공사 운동을 너무 일찍 시작했다. 밥은 돈을 내고 먹어야 한다. 하루 세끼를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먹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헝가리 공산당을 봐라, 매달 한 사람에게 고기를 600g씩 나눠줬지만 폭동이 일어났다.” “자연은 원래 모습대로 내버려둬야 한다. 수천 년간 형성된 물줄기를 억지로 바꾸는 건 미련한 짓이다. 인공호수 같은 건 천천히 해도 된다.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이 정도는 용납이 가능했다.

“중국인들에게 마오 주석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전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다. 단 남용해서는 안 된다. 지난 일 년을 돌이켜 보자. 주석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따르다 보니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잘못된 것은 반대해야 한다. 주석의 심리를 살피느라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숭배는 위험하다.” 이건 좀 곤란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우경 기회주의자의 반당 행위로 규정했다.

방 안에 칩거하던 마오쩌둥은 사흘이 지나서야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주더(朱德·주덕)를 불렀다. 펑더화이의 서신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세 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펑더화이답다”며 웃어넘겼다.

마오의 생각은 이들과 달랐다. “토론에 부치자.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들 하라고 해라. 편지의 성격이 궁금하다.” 세 사람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싸움이건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게 마련이다. 성질 급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돌발행동에 분노했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불만을 토로했다. “주석에게 참고하라며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다. 토론에 부치자고 요구한 적도 없다. 내 의견이라는 표제까지 달아서 모두에게 토론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펑더화이의 편지가 조별 토론의 중심 의제로 등장했다. 펑더화이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예상보다 많았다. 동북조는 한 명도 빠짐없이 펑더화이를 지지했다. 밖에 얼씬도 안 하며 회의 내용을 보고받던 마오쩌둥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국내보다 소련 측에서 먼저 반응이 왔다. 후일 중공 선전부장을 지낸 덩리쥔(鄧力群·등력군)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가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 중국의 대약진 운동 관련 기사를 보내왔다. 펑더화이의 의견과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베이징을 지키고 있던 부총리 천이(陳毅·진의)의 전화 보고도 심상치 않았다. “방금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를 만났습니다. 농담조로 정변을 일으킬 생각이 있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웃어넘기기에는 워낙 민감한 내용이라 보고드립니다.”

소련과의 관계를 놓고 충성도를 가늠하던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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