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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아 있다?

중앙선데이 2013.02.24 03:11 311호 34면 지면보기
누군가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면 소설 쓰고 앉아 있다는 핀잔을 얻어먹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옳은 인과반응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말이 안 되는 말을 말도 안 되게 쓰는 게 아니라, 말이 안 되는 말이라도 말이 되게끔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 쓰고 앉아 있다는 핀잔은 참 그 양반 황당무계한 걸 가지고도 요리조리 이야기를 조리 있게 잘도 만들어 낸다는 칭찬이 되는 셈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세상이 뒤숭숭한 요즘이다. 한데 막상 그 뒤숭숭한 세상 가운데서 가장 태연한 것은 가장 불안해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아닌가 싶다. 사려 깊은 담대함일까? 성숙한 침착함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졸간에 흡수하게 된 통일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삼은 장편소설을 출간한 바 있는 나는 내가 그 책 안에서 묘사한 암울한 사회상에 기겁하거나 나를 무슨 골수 우익 반통일주의자쯤으로 억측하는 적지 않은 독자들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했더랬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우리 남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평소 생각해 보지 않았고 생각하기조차 싫었던 것, 그래서 무의식 속에 꼭꼭 숨겨놓은 통일에 대한 과학적 악몽을 무조건 짜증내다 못해 아예 무시해 버리게끔 체화돼 있다는 것을. 빤한 위기에 부화뇌동하는 게 정상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미사일을 머리맡에 두고서도 매우 진중한 것은 안됐지만 사려 깊게 담대해서도, 성숙한 나머지 침착해서도 아닌 깨놓고 대강 그런 까닭이란 뜻이다.

어느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통일은 불현듯 도래할 것이며 어쩌면 이것이 북핵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이고 또 북핵마저 근본적으로 아우르는 문제라는 게 부족하나마 나의 소견이다. 가령 북한의 핵무장은 갑작스러운 통일의 먼 전조일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통일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많은 탈북자가 남한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채 차별과 멸시 속에서 점점 2등 국민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독일 통일의 경우와는 차마 비교가 불가능한 천문학적 통일 비용 앞에서 한 경제학자는 남북통일이 남한 경제의 성장 한계를 극복해낼 유일한 길일지 모른다고 진단하기도 하고, 한 통일부 관계자는 이북의 어마어마한 지하자원 매장량을 막대그래프로 그려보이며 기꺼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런 이득을 계산하는 마음 자체가 더 큰 비극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확신한다. 한반도의 통일은 어림 반 푼어치 없는 희망의 설교가 아니라 절망에 대한 인내와 희생과 사랑의 시스템을 주도면밀하게 구축해 놓아야만 실마리가 풀릴 사안인 것이다. 하지만 누가? 무엇으로? 과연 어떻게? 그런 괴상한 책을 괜히 쓴 바람에 나는 별로 애국자도 아닌 주제에 통일 대한민국이 봉착하게 될 갖가지 난관들이 문득문득 수시로 떠오르는 병 아닌 병에 걸려버렸다.

와중에 얼마 전 천천히 하강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야경을 온통 뒤덮고 있는 붉은 십자가들이 내게 위대한 소설의 줄거리 하나를 던져주었던 것인데. 아아, 이것이야말로 유일무이한 묘책이 아닌가! 저 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교회 말이다! 불과 몇 십 미터를 두고도 드물지 않게 마주 서 있는 거대 교회들이 통일 이후 자신들의 재산과 인력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의 말씀 따라 이북에서 내려온 동포들을 먹이고 재우고 교육하는 사랑을 실천한다면, 한 동네에도 수십 다발씩 있는 저 작은 교회들이 한 몸으로 연대해 이북 동포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돕는다면, 내가 내 정신 나간 책에서 우려했던 끔찍한 일 같은 것들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그뿐인가. 그러는 동안 자연스레 전도가 이루질 테니 한국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역사 안에서 더욱 그 세가 확장될 것이며, 과거의 여러 부정적인 면모들도 그 뿌리부터 일신하게 될 터이니 과연 하나님이시다! 그런 큰 뜻과 긴 안목으로 남한 전역에 교회들을 밀가루처럼 뿌려놓으셨던 것이로구나!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는 남북통일을 기점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데 쓰일 물적·영적 인프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서울의 변두리 어느 붉은 십자가 밑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는 역시 삼류 컬트 소설가가 맞는가 싶었다. 말이 안 되는 말을 말도 안 되게 지껄였기 때문이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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