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수는 섹스 싱겁게 해요?" 임권택 지적에…

온라인 중앙일보 2013.02.24 02:19
원로 언론학자 김민환(68) 고려대 명예교수가 칠순을 앞두고 책을 냈다. 이미 현역 생활 30년간 공저를 포함해 18권의 책을 냈지만, 이번 책은 좀 달라 보인다. 전공서가 아닌 소설이어서다. 일본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려화가 담징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담징』이다. 김 교수는 2010년 학계 은퇴 후 전남 보길도에 내려가 ‘남은재(南垠齋)’라는 집을 지었다. ‘남쪽 끝에 있는 서재’라는 뜻이다. 한 달 중 보름은 부인과 서울에서, 보름은 보길도에서 홀로 머무른다. 귀촌할 때의 다짐은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살자”였다. 혼자 밥 짓고 설거지하고 잡초를 뽑으며 남쪽 땅 끝에서 그렇게 살려 했다.


법륭사 금당벽화 소재 소설『담징』펴낸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

“담징, 임권택 감독 훈수로 엄청 야한 스님 돼버려”

마을 사람들 눈엔 초라한 독거노인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외롭거나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 2년 반 남짓 그의 옆에 담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서향집 창 너머 수평선으로 지는 달을 바라볼 때도, 산길을 산책 삼아 자박자박 걸을 때도 담징은 그의 동반자였다. 300여 쪽 분량의 소설 『담징』은 담징이 죽고 39년이 흐른 AD 670년 법륭사에 의문의 화재가 일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국사(國師)로 파견온 담징 스님이 속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뒤늦게 아버지의 발자취를 좇는다. 일본 쇼토쿠 태자의 부탁으로 벽화를 그리기 위해 법륭사에 온 담징은 그림뿐 아니라 오경(五經)과 불교 경전에 해박하고 음악에도 능했던 ‘문예인’이었다. 하지만 사가(私家)의 아리따운 여인을 향한 애욕으로 학식과 예술이 높았던 고승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



책 말미에 수록된 삼국시대사, 일본사, 불교서적, 중국 사상과 문화, 미술과 벽화, 음악 등의 참고문헌에서 노년의 여기(餘技)를 넘어서는 진지함이 느껴진다. “소설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담징 스님의 격려 덕에 이겨냈다”는 김 교수를 21일 만났다. 그는 현재 중앙일보 자문위원과 다산연구소 대표로 활동 중이다.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퇴직 후 뭘 하고 살까 고민을 많이 했다. 정치권을 기웃거리거나 방송사에 자리 하나 바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나이에 그렇게 살아 뭐하나 싶었다. 대신 문학청년이었던 옛 꿈을 되살려 글을 쓰기로 했다. 지난해 소설 『하멜』을 낸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내 롤 모델이다. 나도 언론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기자로 일선에서 뛰다가 전문 분야를 살려 대기자가 된 후 만년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수많은 역사 속 인물 중 유독 담징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원래는 시나리오를 쓰려고 했다. 보길도로 내려가기 전엔 해마다 영화를 50편가량 봤을 정도로 영화를 즐겨 본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 지도를 했던 배우 배종옥씨를 비롯해 영화인들과도 자주 만난다. 그중 가장 교분이 오래된 사람이 임권택 감독이다. 워낙 그분의 인품과 예술 세계에 반한 터라 언젠가는 함께 영화를 만들었으면 했다. 몇 년 전 ‘천년학’이 흥행이 잘 안 돼 임 감독이 울적해 하던 때였다. 내가 쓰고 싶은 얘깃거리를 몇 가지 들려줬는데 번번이 ‘괜찮긴 한데, 내 영화 감은 아니오’라며 퇴짜를 놨다. 그런데 담징 얘기를 꺼내니 정색을 하고 고쳐 앉으면서 ‘A4 용지 두어 장 정도로 요약해 보시오’ 하는 거다. 그런데 역사물이어서 영화로 만들기엔 투자받기에 애로가 많을 성싶어 소설로 바꾸게 됐다.”



 -임권택 감독에게선 어떤 조언을 받았나.

 “임 감독이 ‘교수 안 했어도 글로 먹고 살았겠다’며 과분한 격려를 많이 해줬다. 제일 어려웠던 게 담징과 여인의 정사 장면을 묘사하는 거였다. 내 딴엔 개울물이 두 갈래로 흐르다 하나로 합쳐지는 식의 상징적인 묘사를 했다. 그런데 임 감독이 그 대목을 읽더니 ‘교수들은 섹스를 이렇게 싱겁게 해요?’ 하는 거다. 그 말 듣고 당장 고쳐 썼다. 임 감독 때문에 담징이 원래 썼던 것보다 훨씬 야한 스님이 돼버렸다(웃음). 서하진 경희대 국문과 교수는 ‘섹스 비디오를 몇 개 사서 참고하라’고 권했다. 적나라하게 묘사를 해본 적도 있는데 제자들이 볼까 겁나 수위 조절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글을 써보니 어땠나.

 “단편소설 한 편 써본 적 없는 사람이 장편에 도전했으니 왜 막히는 게 없었겠나. 시인이자 평론가인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와 서하진 교수가 많이 지도해 줬다. 빨간 펜으로 죽죽 그으면서 통째로 들어낼 부분 등을 지적하는데, 대체 뭘로 채워넣을지가 막막하더라.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까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하는 담징 스님의 목소리를 느끼며 기운을 냈다.”



 -담징의 어떤 점이 흥미를 끌었나.

 “언론학자나 기자나 현상을 계속 좇다 보면 자연히 그 현상을 낳은 시대 배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내 전공이 근대 한국언론사다. 개화기 이후 대중매체의 성장을 연구하다 보니 문자의 발달이나 종이의 발명 과정에도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 한지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알고 싶어 문헌을 뒤졌다. 우연히 담징이 AD 610년 스이코(推古) 천황 18년에 일본으로 가 종이와 채색화를 보급했다는 기록을 보게 됐다. 유학과 불교 이론에도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맷돌과 연자방아, 칠기를 소개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거기서 의문이 생겼다. 이 정도면 그냥 절에 머무른 게 아니라 저잣거리 민중과 부대끼며 살았다는 얘기다. 학식 높은 고승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뭔가가 있었으니 수행 삼아 그렇게 절을 떠나 방랑하지 않았을까, 깨달음을 방해한 건 대체 뭐였을까 궁금했다. 지위도 있고 대접도 받았으니 권력욕이나 물욕은 아니었겠다 싶었다. 그래서 청상과부 여인을 등장시켜 애욕에 번민하는 담징을 그려보기로 한 거다.”



 -담징 얘기로는 교과서에 실린 정한숙의 ?금당벽화?가 유명한데.

 “정한숙 선생은 담징을 민족주의자, 애국자로 봤다.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국가라는 울타리를 부질없게 여긴 코스모폴리탄으로 봤다. 담징이 미륵을 통해 얘기하고자 했던 건 부드럽고 기품 있는 포용력이다. 오늘날 일본은 물론 진영논리로 갈라져 싸우는 한국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금당벽화를 담징이 정말 그렸느냐를 놓고는 논란이 있다.

 “금당벽화를 그린 후 법륭사 화재로 그림이 소실됐다. 지금의 금당벽화는 7세기 중반에 누군가 그린 거다. 아마도 담징의 제자들일 거라고 본다. 그래서 소설에서 담징이 미륵불만 그리고 제자들이 나머지를 그린 걸로 처리했다.”



 -불교 설화를 상당히 많이 인용했다.

 “소설을 준비하며 불교 관련 서적을 100권 넘게 찾아봤다. 실상사 도법 스님과 월정사 정념 스님도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난 가톨릭 신자인데 『담징』을 쓰면서 불교에도 큰 애정을 갖게 됐다. 참 뛰어난 종교다. 불교 서적뿐 아니라 『일본 서기』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 상상력만 갖고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 논문 쓰는 것과 비슷하다. 근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비약을 하면 논문이 부실하다. 역사가 사실과 사실이 만나 빚어진 허구라고 한다면, 소설은 허구와 허구가 높은 개연성으로 연결된 사실이다. 내 소설은 허구지만 허구적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또 쓸 건가.

 “1921년 시베리아에서 일어난 자유시사변을 소재로 구상 중이다.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소재로 다음 소설을 쓰겠다고 했는데 내가 양보를 받았다(웃음).”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