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4) 몽돌과 받침대 ①

중앙일보 2013.02.15 01:06 종합 2면 지면보기
2002년 12월 21일. 대통령 선거가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난 이틀 뒤였다. 당선인 비서실장인 신계륜 민주당 의원의 전화를 받았다. 만나자는 거였다. 나는 축하 인사를 건네며 사흘 후 오찬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신 의원은 다급히 말했다.


고건 찾아온 盧 "법무는 생각해둔 사람이…"

 “하루빨리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당장 시간을 내주십시오.”



 대선 기간 중 내 개인 사무실로 찾아온 민주당 중진 김원기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나를 초대 총리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지 선언을 해달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는 두 가지 요청 다 사양했다. 하지만 나를 총리로 앉히려는 노 당선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12월 22일 서울 대학로 일식집 ‘석정’ 에서 신 의원과 마주 앉았다.



 “시장님, 당선인께서 초대 총리를 맡아줘야겠다고 하십니다.”



 신 의원은 나를 시장이라 부른다. 1998년 민선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을 때 비서실장으로 선거를 도와줬다.



 “아이구. 그런 말 하지도 마세요. 못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새로운 사람 이 해야 하는데 나 같은 ‘올드 보이’가 왜 총리 재수를 해요?”



  거절 이유를 쭉 설명했다. 신 의원은 안절부절못했다. 밖에서 통화하고 다시 방에 들어오길 두세 번 반복했다. 제주도에 내려가 있다는 노 당선인과 통화하는 듯했다. 난처한 얼굴을 한 신 의원은 최후 통첩과 같은 말을 꺼냈다.



 “당선인께서 내일 서울에 올라오는 즉시 시장님 댁으로 찾아뵙겠다고 합니다.”



 큰일났다. 넓지 않은 혜화동 집에 대통령 당선인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당선인과 함께 올 수행단과 경호원들은…. 기자들이 몰려들면 어떻게 하나. 무엇보다 집까지 찾아온 대통령 당선인에게 총리직 거절 의사를 밝힌다는 것은 큰 결례였다.



대선 직후인 2002년 1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을 만날 때 고건 전 총리가 가지고 갔던 자필 메모. 단락 앞에 A부터 E까지 순서를 매겼는데 A~B는 노 당선인을 만나기 전 미리 써뒀던 글이다. “5년 전에 총리를 한 사람이 다시 또 총리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란 문구가 보인다. 나머지는 대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오른쪽 아래 ‘이종찬 국정원장’이라고 적혀 있다. 고 전 총리가 노 당선인이 제안한 인수위원장 직을 거절하면서 “전 정부에서 인수위원장이 총리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사례로 든 인물이다. 이전 원장은 김대중 정부 시작에 앞서 인수위원장을 지냈다. [고건 전 총리 제공]


 “엇, 안 됩니다. 제가 밖에서 당선인을 만나겠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십시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저녁 신라호텔 전망 좋은 방에 노 당선인, 신 의원 그리고 나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나는 준비한 대답을 했다. 정가(政街)에서 말은 늘 불씨로 작용하는 일이 많다. 이런 경우를 많이 본 나는 할 말을 미리 정리해 적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먼저 당선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새 얼굴을 총리로 내세워야 합니다. 5년 전 총리를 한 사람은 새 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제 자신도 부담스럽습니다.”



 노 당선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개혁 대통령’을 위해선 ‘안정 총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제가 몽돌처럼 생긴 돌이라면 총리는 그 돌을 잘 받치도록 나무 받침대처럼 안정적인 사람이어야 짝이 잘 맞습니다.”



 몽돌은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해서 잘 굴러다니는 돌을 말한다. 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신의 기질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리고 노 당선인이 말한 받침대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노 당선인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럼 제가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새 정부 출범까지는 두 달이 남아 있습니다. 당선인께서도 널리 다른 총리 후보자들을 구해 보십시오. 그래도 없으면 연락 주십시오.”



 선택권을 노 당선인에게 넘겼다. ‘조건부 수락’이었다. 팽팽했던 긴장은 이 대화로 어느 정도 풀렸다. 인수위원장 직도 맡아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총리 자리도 조건부 수락한 마당에 인수위원장을 할 순 없었다. 술은 반주 한 잔 정도가 오갔다. 분위기는 한층 누그러졌다.



 자연스레 대화는 내가 김영삼 정부 마지막 총리로 임명되던 때 얘기로 옮아갔다. 나는 국무위원 해임 제청권 행사를 전제로 김 전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를 조건부 수락했던 일을 얘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노 당선인이 거기서 한발 더 나갔다.



 “해임 제청권뿐만 아니라 아예 실질적인 내각 인선까지 맡아서 해주시죠.” 잠시 뜸을 들이다 한마디 더 꺼냈다. 계면쩍어하면서 “다만 법무장관만은 제가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는데…”라고 했다.



  누구인지 노 당선인은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강금실 변호사였다.



  바로 장관 인선 기준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덕성을 기초로 해서 각 부처에 맞게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광범위한 데이터 베이스를 가지고 탕평 인사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눴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무거운 생각을 놓지 못했다. ‘한 번 더 총리를 하는 게 맞을까.’ 쉽게 끝날 고민이 아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그 인물



신계륜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59세. 4선 의원이다. 2002년 대선 직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간 단일화 협상을 성사시켰다. 1998년 서울시장 선거에 국민회의 고건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비서실장을 맡았다. 고 후보 당선 이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다. 2012년 대선에선 민주통합당 문재인 캠프 특보단장으로 활동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