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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그랜드 팬윅

중앙일보 2013.02.15 00:33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영종
정치부문 차장
북부 알프스 험준한 습곡에 자리한 공국(公國) 그랜드 팬윅. 해발 60m의 산과 강 하나에 길이 8㎞, 폭 5㎞인 작아도 너무 작은 나라다. 건국 600년간 평온했던 나라에 위기가 닥친다. 태평성대로 4000명이던 인구가 6000명까지 늘어나자 특산품인 와인 수출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와인에 물을 타서 돈을 더 벌자는 ‘희석당’과 품질과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는 ‘반(反)희석당’이 맞서 정국은 혼미해진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처녀 군주 글로리아나 12세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은 엉뚱하게도 미국과의 전쟁 선포. 그녀의 판단은 이랬다. “미국은 자기네와 전쟁을 해 패한 나라에 구호와 원조를 아끼지 않는 이상한 나라예요. 일단 전쟁을 선포한 다음 재빨리 항복하는 것만큼 수지맞는 해결책이 없어요.”



 선전포고문을 보낸 그랜드 팬윅은 24명의 원정부대를 300t급 범선 엔데버로편으로 미국에 상륙시킨다. 하지만 뉴욕항과 시내는 텅 비어있었다. 때마침 미 동부지역에 화성인 침공에 대비한 공습경보가 내려진 때문이었다. 세관 건물에 공국 깃발을 건 그랜드 팬윅은 승전을 선포한다. 얼떨결에 Q폭탄이란 핵무기도 전리품으로 챙긴다. 선전포고를 장난 편지로 여겨 졸지에 패전국이 된 미국. 그랜드 팬윅은 그를 상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세계경찰을 자임한다. 대미 공격을 주도한 승전장 털리 베스컴은 이렇게 말한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앞으로 우리가 세계를 좌지우지할 겁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미국 작가 레너드 위벌리의 장편소설 『약소국 그랜드 팬윅의 뉴욕침공기』는 상상 속의 이야기다. 냉전시대 전쟁과 핵 공포를 위트와 풍자로 다뤄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표효하는 생쥐(The mouse that roared)’란 원제에서 눈치챌 수 있듯 생쥐에게 비유할 약소국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핵무기를 발판으로 반전을 이루는 스토리가 흥미롭다.



 몇 해 전 읽은 이 책을 북한 핵실험 뒤 다시 손에 잡았다. 꼭 60년 전 첫선을 보인 풍자소설에 2013년 2월 중순의 북한이 자꾸 오버랩됐다. 29세의 집권 2년차 지도자 김정은이 자신을 그랜드 팬윅의 어린 군주 글로리아나의 환생 아바타쯤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21세기의 냉혹한 국제 현실은 북한을 풍자소설 속 그랜드 팬윅으로 만들어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무엇보다 핵을 들고 앙앙불락하는 북한에선 대국에 맞선 약소국을 보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막가파식으로 룰을 어긴 나쁜 결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만장일치 지탄뿐이다. 3대 세습 독재권력을 유지하려는 김정은의 탐욕만 뚜렷이 드러난다. ‘인민의 허리띠를 조이지 않겠다’던 지난해 4월 그의 공개 연설은 식언(食言)이 됐다. 어떻게든 민생을 챙기려고 선전포고 직후 항복이란 지략을 펼친 여군주의 발치도 따라가지 못한다.



 핵만 있으면 강성대국이 될 것 같은 망상을 하는 건 자유다. 그렇지만 그 이상은 금물이다. 도발은 풍자가 아니라 김정은이 주인공인 파멸적 비극이 될 수 있다.



이 영 종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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