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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마카오 이야기

중앙일보 2013.02.13 09:42
21세기 원명원이 된 연꽃(蓮花)의 나라



마카오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마카오가 중국의 남단 끝 사람들이 잘 살지 않는 중국의 외딴지역에서 포튜갈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다시 중국에 반환된 지 13년이 지났다. 이제는 미국의 라스베가스 카지노 재벌들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모습이다. 마카오는 포튜갈-중국-미국의 3국과 연결되어 발전하고 있다.



16세기 중반 포튜갈이 무역거점으로 만든 마카오는 주강 삼각주 끝자락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였다. 그리고 그 아래쪽의 2개의 섬은 중국(淸)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면서 전의를 잃고 있을 때 포튜갈이 무단 점령한 섬이다. 타이파 섬은 1차 아편전쟁 후(1852) 콜로안느 섬은 2차 아편전쟁(애로호사건)(1864)을 계기로 차례로 점령하였다. 현재 마카오는 마카오반도와 2개의 섬을 말한다. 마카오의 행정특구의 깃발에 마카오의 상징 연꽃 잎 3개는 이 세 지역을 나타낸다.



그러나 지금은 타이파 섬과 콜로안느 섬 사이를 매립하여 2개의 섬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매립한 지역을 콜로안느와 타이파의 첫 글자를 따서 “코타이”라고 부른다. 코타이 지역을 합칠 경우 마카오는 4곳으로 나누어진다. 지금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재벌들이 동방의 라스베가스를 만들고 있는 곳이 코타이 지역이다. 이곳의 이름도 “라스베가스 스트립”의 이름을 따서 “코타이 스트립”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세계의 일류 호텔과 진귀한 것을 다 모아 놓은 21세기의 원명원(圓明園)이다.



마카악( 閣)과 꿔로완(過路環)



마카오는 본래 광동성이나 복건성의 어부가 계절에 따라 고기를 잡는 작은 어촌이었다. 몽골족이 송(宋)을 침입하여 송의 유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피난을 오게 됨에 따라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후 17세기 청(淸)의 세력에 밀린 명(明)의 잔존세력들이 다시 바닷가로 내려 왔다. 현지인들은 마카오를 작은 만(灣)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으로 아오믄(澳門)이라고 불러 왔다. 처음 포튜갈 사람들이 마카오 반도의 최남단에 상륙하여 사당인 중국식 기와집을 뭐라고 부르느냐고 물어 현지인이 “마카악( 閣)”이라고 말했다는데 마카악이 변형되어 마카오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15세기에 지은 바다의 여신 마조( 祖)의 사당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지금의 타이파 섬의 유래도 재미있다. 포튜갈인이 지역 이름(nome)이 뭐냐고 묻자 현지인은 “노메”를 “누오미”(찹살의 중국어)로 알아듣고 찹살이 많이 있다는 뜻으로 “따바”(大把)라고 했다고 한다. 포튜갈인은 뜻은 모르고 “타이파”라고 들은 대로 기록해 갔는데 지금의 타이파가 되었다는 것이다. 콜로안느는 현지인이 순환로의 의미인 “로완”(路環)을 지난다는 의미로 “꿔로완”(過路環)이 와전되어 콜로안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타이파에는 예부터 연꽃이 많아 불교에서 항해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관음보살과 연결시켜 연화도(蓮花島)라고도 불렀다. 지금도 바로 관음의 상(像)이 있고 이웃의 중국 주하이(珠海)의 헝친다오(橫琴島)와 연결하는 다리가 연화교이다.



김대건 신부와 마카오



포튜갈 인들은 1510년경 아프리카 희망봉을 넘어 인도양을 거쳐 인도의 서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고아에 있던 무슬림 아랍사람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동방무역의 기지로 삼는다. 그리고 말라카해협에서 처음으로 중국 장크선을 만나고 250년전 마르코 폴로가 저술한 동방견문록의 중국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는데 흥미를 느꼈다. 그들은 장크선의 안내로 지금의 마카오로 들어 왔다. 포튜갈 인들은 마카오가 중국과 고아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훌륭한 중계무역지가 될 것으로 생각 중국정부로부터 이곳을 유료 임차하여 무역의 기지로 삼는다. 한편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포튜갈 예수회 선교사들도 이곳을 대 아시아 선교의 기지를 만든다. 마카오의 바울성당은 1580년에 세워져 1602년 극동 최초의 신학대학이 되었고 그 후 수차례 화재와 재건축이 이어졌으나 마지막으로 불탄 것은 1835년으로 그 후는 재건축되지 않았다. 마카오의 심볼이 된 바울성당의 앞부분이 화재를 모면한 성당의 일부이다. 내부는 현재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김대건 신부가 수학한 곳이 당시 신학대학이었던 바울성당이었다.



일본에 기독교를 선교한 프란시스코 짜비에르 신부(1506-1552)는 말년에 일본문화에 영향을 끼친 중국인에게 선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와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서 선교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이 곳 박물관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한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순교한 성인(聖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카오를 사랑한 공처가 친너리



영국의 상인들이 아편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홍콩을 획득하기 전까지 포튜갈 정부의 도움으로 이곳에 물품창고를 짓고 대 중국 무역을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당시 영국의 유명한 화가 친너리(G. Chinnery)는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런던출신이었으나 아일랜드로 유학 현지인과 결혼하여 애를 두 명이나 가졌지만 생활력이 강한 아이랜드 여자의 엄처시하에 시달렸다. 부인은 친너리의 자유로운 영혼을 붙잡아 두고자 하였으나 친너리는 참지 못하고 가출 인도 칼카타에 숨어 살고 있었다. 나중에 가출 행선지를 알게 된 부인이 화가 나서 인도까지 찾아 오겠다하여 친너리는 다시 짐을 싸야 했다. 그는 당시 외국 여자의 상륙이 금지된 것으로 소문이 난 중국(마카오)으로 도피하였다. 그때가 홍콩이 세상에 알려지기 17년 전인 1825년의 일이었다.



그는 아편전쟁 후 영국이 할양받은 홍콩을 가끔 찾아 가 홍콩의 풍경을 화폭에 실었다. 그리고 홍콩의 아편재벌 자르딘(W. Jardine)과 친하게 지내 그와 가족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가 그린 자르딘의 초상화가 지금도 홍콩의 자르딘 하우스 로비에 걸려 있다, 자르딘 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홍콩의 맨다린 오리엔탈 호텔에는 친너리의 그림을 수집해 놓고 그의 이름을 딴 칵테일 바도 있다. 그는 마카오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기를 좋아 했고 인물 풍경화도 수없이 그리면서 혼자 살다가 1852년 5월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마카오의 서양인 공동묘지에 남아 있다.



홍콩으로부터 서쪽으로 65km 떨어진 마카오는 홍콩보다 150년 정도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홍콩이 토지의 부족으로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는 구건물을 헐고 지어야 했기에 대항해시대의 면모를 보여주는 옛 건물이 많이 사라졌지만 마카오는 경제발전이 미미하여서 인지 옛 건물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마카오의 30여개의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이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포튜갈 보다 한발 늦게 이곳에 온 화란 인들은 무역입지가 기막히게 좋은 마카오에 눈독을 들여 빼앗아내려고 하였다. 포튜갈 인은 용감하게 침략자 화란 인을 몰아내었다. 화란 인들은 부득이 북쪽으로 쫓겨 가 포모사(臺灣)섬을 차지하였다. 당시 포모사는 마카오와 같은 무역입지를 가지지 못한 별 쓸모없는 섬이었다. 세계2차대전시 마카오는 홍콩의 재벌들에게 정치적인 생츄어리(피난처) 역할을 했다. 1941년 크리스마스에 홍콩을 점령한 일본은 중립을 선언한 포튜갈이 지배하고 있는 마카오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일국양제(一國兩制)의 마카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광동의 자유기업인들이 홍콩과 마카오로 이민을 하였다. 마오쩌뚱(毛澤東)의 문화혁명 때는 홍위병들이 홍콩과 함께 마카오를 그냥두지 않았다. 거리에는 홍위병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정치적 혼란으로 마카오를 지키기 어렵게 된 포튜갈 정부는 마카오의 자진 반환을 중국정부에 요청하였다. 중국으로서는 포튜갈이 물러나면 마카오는 관세도 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땅이 되리라 생각하고 반환을 거절하였다.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마카오를 유지하기 위해 포튜갈 정부는 홍콩 사람들을 상대로 한 카지노 사업을 허가하였다. 1962년 홍콩의 스탠리 호의 오락재벌이 마카오 여행오락공사(STDM)를 설립 리스보아 호텔을 짓고 카지노 사업을 독점하였다. 포튜갈의 마카오 정부는 마카오 예산의 60%를 스탠리 호의 카지노 수입에서 충당하였다고 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등장한 중국정부는 홍콩의 신계(新界) 반환의 99년을 앞두고 일국양제의 방안을 마련하였다. 외교권등 주권은 중국으로 반환시키되 내치 경제는 현재의 시스템을 50년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안을 만들어 놓고 홍콩과 마카오에 적용코자 하였다. 영국의 대처정부는 영구 조차인 홍콩 섬은 논외로 하고 99년 장기 리스인 신계(新界)에 대해 연장교섭을 시작하였다. 일국양제 방안을 준비한 중국은 영국의 연장 안에 반대하고 오히려 불평등조약으로 빼앗긴 홍콩 섬의 반환까지 요구하였다. 당황한 영국은 신계는 돌려주더라도 홍콩 섬의 반환은 국제법을 내세워 거절하였다. 그러나 홍콩의 생명선인 물 전기등이 대부분 신계(新界)에 공급되어 홍콩은 신계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은 홍콩을 살리기 위해서는 중국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97년7월1일 일국양제의 원칙하에 홍콩이 반환되고 1999년 12월 20일에는 마카오도 같은 방식으로 중국에 반환되었다. 마카오의 포튜갈 총독이 물러가고 마카오의 초대 행정장관으로 40대 중반의 에드몬드 호가 임명되었다.



에드몬드 호의 역발상



에드몬드 호는 마카오 발전의 청사진을 당시 국가주석 후진타오에게 제출하였다. 중국정부는 1962년부터 내려 온 스탠리 호의 카지노 독점권을 풀었다. 2002년 마카오의 카지노 독점이 깨지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미국 라스베가스 카지노 재벌들이었다. 미국은 경제 성장과 함께 카지노가 필요하여 산업이 없는 네바다주의 사막 한복판인 라스베가스에 카지노 산업을 허가하였다. 미국의 전성기에는 라스베가스 카지노 산업이 번성하였으나 미국 경제의 침체와 함께 라스베가스 카지노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카지노 입지를 찾던 중 라스베가스 재벌들은 마카오에 컨벤션산업을 곁들인 카지노 호텔 건설을 시작하였다. 카지노 재벌인 “샌즈 차이나”를 세운 쉘돈 아델손과 “윈 마카오”를 세운 스티브 윈이 앞장을 섰다. 그 외 MGM등 라스베가스의 주요 카지노 재벌들이 참여하였다. 우선 마카오 반도에 아델손과 윈은 카지노 호텔을 건설했다. 지금까지 독점에 안주했던 스탠리 호도 과거 리스보아 호텔 옆에 그랜드 리스보아를 신축했다. 떠오르는 중국의 경제를 밝혀 줄 횃불을 디자인한 호텔이었다. 마카오의 카지노 수입은 라스베가스를 추월하였다. 실업율 제로인 마카오 주민의 개인별 소득도 홍콩을 앞질렀다. 초대 행정장관 에드몬드 호의 비젼이 적중하였다. 그는 10년의 임기를 채우고 이제는 중국정치협상회의의 부회장이 되었다.



동양의 라스베가스: 코타이 스트립



중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중국인의 카지노의 수요는 계속 커지고 있다. 카지노 재벌들은 신규 매립지에 리틀 라스베가스인 “코타이 스트립“에 거액의 투자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델손은 라스베가스의 ”베네티안“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카지노인 ”마카오베네티안“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윈은 마카오 반도에 2개의 거대한 카지노장을 만들고 ”코타이 스트립“에도 상당한 부지를 확보 호텔을 건설하고 있다. ”시티 오브 드림즈“라는 이름으로 하이야트, 크라운, 하드록 호텔도 카지노 산업에 뛰어 들었다.



홍콩의 오락재벌 은하(銀河)그룹의 루이(呂志和)회장은 오꾸라, 반얀트리호텔등 일본과 싱가폴의 호텔기업을 끌어 동양취향의 “마카오 갤럭시”를 개장하였다. 마카오 공항이 인근에 있는 “타이파 스트립”에는 카지노 테이블만 들여 온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있는 쇼핑 페스티발 앤터테인먼트도 끌어 들였다. “베네티안”에는 이태리 베니스와 같은 곤돌라를 탈 수 있고 하얏트 호텔의 수무간(水舞間 the house of dancing water)은 거대한 풀장이 무대가 되어 특이한 워터 쇼를 보여 주고 있다. 지금 마카오 지역에 31개의 카지노가 우후죽순처럼 신축되어있다. 그리고 다리 하나 사이에 두고 마카오 전체의 3배에 달하는 거대한 매립 섬 중국의 헝친다오(橫琴島)에 미국의 카지노 재벌들이 컨벤션과 리조트를 겸해 세계 최대의 오락장을 준비 중이다.



조용한 어촌 그래서 제대로 된 기와집 건물로는 바다의 여신 아마(阿 )의 집 밖에 없었던 마카오에 포튜갈 사람들이 400여년간 지배하고 다시 주권은 중국에 돌아 왔으나 미국의 거대 카지노재벌의 진출로 마카오는 상전벽해의 변신을 보여 주고 있다. 최근 카지노 재벌 아델손과 윈이 한국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 부(富)의 60%가 모여 있는 중국의 동부 연안지역을 마주보고 있는 한반도 서해안에 또 하나의 마카오를 고려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카오의 초대 행정장관 에드몬드 호같은 발상의 전환이 한국에도 필요한 때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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