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강경책엔 벼랑 끝 전술
경수로 등 ‘당근’은 챙기며
핵무기화 한 발짝씩 접근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등장한 98년 북한은 돌변했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재추대해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시작된 유훈 통치를 끝내며 ‘김정일 시대’ 개막을 선언하면서다. 북한은 그해 8월 장거리 로켓인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이에 김대중·클린턴 정부는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로 핵동결과 미사일 발사 중단을 시도했다. 로켓 발사를 중단하면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병행 방식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도 맥락이 비슷했다. 이 같은 유화책 속에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도 성사됐다.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자 북한은 다시 대미 강경책으로 바뀐다. 2002년 북한은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특사에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하며 2차 핵 위기가 불거졌다. HEU는 우라늄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 농축시킨 뒤 무기급 우라늄으로 만드는 우라늄탄 개발의 출발점이다. 그해는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김대중 정부가 대선을 치르며 대북 문제에 전력투구를 하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와 부시 행정부는 고심 끝에 6자회담이라는 외교적 해법을 시도했지만 북한의 핵개발 의지 앞에서 결국 무용지물로 끝났다. 2005년 북한은 영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다시 꺼내 이번엔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해 플루토늄탄을 만드는 또 다른 핵위협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으로 북한의 모든 핵무기 포기라는 합의가 이뤄졌지만 1년도 지나지 않은 2006년 7월 북한은 미국 독립기념일(미국 워싱턴 시간 7월 4일)에 대포동 2호를 쐈다.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를 채택하자 제재가 부당하다는 명분으로 그해 10월 9일 1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핵실험까지 계획한 치밀하게 준비된 행보였다. 북한은 벼랑 끝 전술 후엔 유화책을 구사했다. 다음 해인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고 12월엔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방북해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북한은 2008년엔 CNN 등 미국 언론까지 초청해 영변의 원자로 냉각탑 폭파를 전 세계에 중계하는 언론 플레이도 구사했다.
그러나 오바마 1기 행정부가 출범한 2009년 5월 북한은 2차 핵실험을 강행한다. 미국의 정권 교체 후 대북 정책이 완성되지 않은 전환기 상황을 이용해 핵실험으로 허를 찔렀다. 3차 핵실험은 그간 후견인 역할을 해 오던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2일 이뤄졌다. 이명박·오바마 체제에서 남북 관계가 침체되고, 북·미 대화도 지지부진하자 역시 오바마 2기 행정부 출범에 맞춰 3차 핵실험으로 강공을 구사했다. 북한은 91년 남북이 함께 체결한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에서 “핵개발을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은 이와는 정반대로 진행됐고 3차 핵실험을 앞둔 지난 1월엔 아예 “비핵화 공동선언은 백지화됐다”고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주장했다.
세 차례의 핵실험에 대한 북한의 공식 발표는 북한이 핵무기 기술 확보를 일관되게 추진했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지하 핵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했다”(1차)→“폭발력과 조종기술에서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진행됐다”(2차)→“소형화·경량화된 원자탄을 사용했다”(3차)고 밝혔다. 첫 핵실험 성공→폭발력 강화→소형화 성공이라는 핵탄두 개량에 한 발씩 접근한 것이다.
채병건·조현숙 기자
◆ 2087= 지난해 12월 12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도발 후 올 1월 22일 나온 유엔 안보리 대북 결의안이 2087호다. 대량살상무기(WMD)를 만들기 위한 물품 유입을 그물망식으로 차단하는 등 고강도 내용을 담고 있다. 결의안 채택 후 북한은 “비핵화를 포기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