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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안창호, 헌법 앞에 서다

중앙일보 2013.02.13 00:23 종합 34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긴 것에는 감겨라. 이왕이면 강한 쪽에 붙는 게 낫다는 일본 속담이다. 개인의 결정을 탓하기 힘들지만 사회적으로도 옳은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검찰총장과 헌법재판관 중 어느 쪽이 더 길까. 지난해 9월 국회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됐다. 질문자는 윤재옥 새누리당 의원, 답변자는 서울고검장 출신의 안창호 후보자였다. 다음은 청문회 회의록 내용이다.



 -고위 검찰 간부님들이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을 선발할 때 지원하거나 희망하는 분위기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참 말씀 드리기가 어려운데요. 지금 총장이랑 같이 있다면 총장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입니다.”



 -어쨌든 헌법재판관을 희망하신 거지요?



 “여하튼 결국에는 그렇게 됐습니다.”



 불과 네 달 뒤 이 답변은 뒤집힌다. 안 재판관은 지난달 검찰총장 후보자 추천 과정에서 인사 검증 동의서를 냈다. 6년 임기의 현직 재판관이 3권 분립의 울타리를 넘어 리크루트(채용) 시장에 나온 것이다.



 안 재판관의 해명은 이러했다. “며칠 고민하다가, 평상시라면 몰라도 검찰 개혁이 중요한 이런 시기에는 임명권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한겨레신문 1월 29일자) 뒤이어 검증 동의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튀어나왔다. 안 재판관이 동의 요청을 거절하자 정진영 민정수석이 직접 설득했다는 얘기였다. 정 수석은 “왜 굳이 청와대가 나서겠느냐”고 부인했다. 그렇다면 안 재판관은 과연 누구 약속을 믿고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인가.



 지난주 목요일(7일) 상황은 한 번 더 꼬인다. 법무부 검찰총장 후보자 추천위원회가 발표한 3명의 후보자 명단에 안 재판관 이름은 없었다. 검증 동의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동의를 철회하지 않은 채 추천을 기다렸던 그로선 체면을 완전히 구긴 셈이다.



 이제 법조계 전체가 안 재판관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27년간의 검사생활을 성실하게, 흠 없이 마무리했다. 그러나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뜻을 헤아리고 재판 대상인 수사기관에 사실상 지원서를 냈던 이가 독립적·중립적 심판자로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한 변호사는 “안 재판관이 제대로 판단한다고 해도 결정 하나하나를 두고 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청사는 온통 잿빛이다. 이동흡 소장 후보자 사퇴 거부에 안 재판관 파문이 겹치며 조직의 위상이 밑동부터 흔들리고 있다. 헌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따른 개헌으로 출범한 뒤 국민의 기본권을 확인하고 군사정권의 악법들을 일소해온 기관이다. 헌재 안팎에선 “지난 25년간 쌓아 올린 신뢰를 전·현직 재판관들이 한 달 사이에 날려버렸다” “차라리 대법원에 흡수되는 게 나을지 모른다”는 개탄이 새나온다. “앞으론 청문회에서 검찰총장 할 마음이 있는지도 물어야 할 판”이란 허무 개그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면 그만인가. 이젠 끝난 일이니 모두 침묵하고 모르는 체하면 되는 것인가. 더 기가 막힌 건 법질서를 강조해온 이명박 정부와 법 원칙을 세우겠다는 박근혜 정부가 바통을 주고받는 과도기에 한국 법치주의의 중요한 상징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주 법조계엔 또 하나의 우울한 소식이 있었다. 윤동민 전 검사장 별세. 동기 중 선두였던 그는 1999년 변호사로부터 받은 명절 떡값을 도서상품권으로 바꿔 방호원 등에게 나눠준 사실이 알려지자 길게 변명하지 않고 옷을 벗었다. “‘눈을 떠보니 밤 사이 벚꽃이 졌더군’. 후배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싶을 뿐이다.”



 법률가 안창호는 지금 박종철과 이한열이 만든 헌법 앞에 서 있다. 긴 것엔 감기는 게 세상 사는 이치라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설 자리와 서지 않을 자리,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자만이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권 석 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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