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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박근혜, 나는 내 운명 …

중앙일보 2013.02.13 00:22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하경
논설실장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고(故) 김근태 의원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박정희 이후의 모든 대통령은 죽은 박정희와 경쟁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운명이다.” 맞다. 박정희는 18년간 집권했다. 최빈국을 잘살게 하고 남북 간 체제경쟁에서 열세를 역전시켰다.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부동의 1위다. 그는 “박정희가 누린 18년은 한 정치인이 가질 수 있었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이라고 했다. 그뿐인가. 반대세력을 무력화하는 초법적 권력기구를 두었다. 그의 한마디는 곧 법이었고, 통치의 효율성은 극대화됐다. 집권 중반기만 되면 레임덕을 걱정하는 5년 단임의 대통령들은 박정희와 비교되는 것이 몹시 억울할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의 불리한 경쟁은 자식인 박근혜 당선인도 예외가 아니다. 과연 ‘산 박근혜’가 ‘죽은 박정희’를 이길 수 있을까. 힘겨운 승부가 될 것이다. 당선인은 당장 아버지가 달성한 성장의 그늘인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하고, 일자리도 늘려야 한다. 핵도박에 나선 북한과의 관계도 난제다. 대선에서 찍지 않은 48%의 눈길은 여전히 싸늘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당선인의 승부수는 단 하나뿐. 고통스럽지만 과거의 축적물인 현재의 나와 결별하는 것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효율을 위해 민주주의의 가치와 절차, 과정을 희생시켰다. 당선인은 그런 아버지의 생물학적 DNA와 정치적 유산을 동시에 물려받은 후예다. 당선 직후 외국 언론이 규정했던 ‘독재자의 딸’이라는 프레임이 오류였음을 보여주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반대했던 48%를 끌어안아 ‘100% 국민의 대통령’ 지위를 획득하고, 박근혜식 개혁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과연 당선인이 해낼 수 있을까. 대개 사람의 과거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지난 대선 최대 이슈였던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불을 댕긴 사람이 누구였는가. 진보, 공공성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웰빙 정당’ 한나라당의 대표였던 박근혜 후보였다. 더구나 경제민주화는 민주당 강령 1호다. 각종 조사에서 경제민주화를 잘 이뤄낼 후보로 박근혜 후보가 꼽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 당선인은 재임 5년간 135조원이 드는 복지 공약 이행에 관료와 전문가들이 목청 높여 우려를 표시해도 꿈쩍도 안 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챙기겠다는 선거공약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이게 박근혜다.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과 전복, 그리고 진정성으로 한국 보수에 부족했던 자기성찰과 쇄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새누리당 진영의 고질적 약점인 공공성의 결핍도 단숨에 해결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렇다면 당선인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장하는 데도 주저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이미 계사년 새해 인사를 통해 “낡은 것들과 작별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다만 여론을 경청하고 입법부와 야당을 존중하는 자세가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길 기대한다. 소통과정이 생략된 자기 확신과 고독한 결단은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낡은 리더십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민정 이양 후 처음 치러진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에게 승리한 뒤 내놓은 박정희 당선자의 취임사 녹취록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패배한 소수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를 보호하는 데 더욱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중략) 민주주주의는 몇 사람의 지도자나 특수계층의…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각과 책임, 그리고 상호의 타협과 관용을 통한 사회적 안정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성숙한 이해와 강력한 신념이 읽힌다. 절대빈곤 탈출과 산업화, 근대화, 그리고 남북 간 체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다 보니 민주주의 가치를 희생시켰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당선인이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확장하는 일을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당선인은 언젠가 “아버지의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라고 말했다. 지금 복지에 전력을 다하는 것도 결국 아버지의 꿈을 살리는 길이 아닌가.



 당선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제를 만들었고, 당을 일신해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특정 세력에 포박당하지 않은 예외적 인물이다. 그러기에 진영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역사와 국민을 상대로 결단할 수 있는 최적의 정치인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민주주의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그게 한국사회의 합리성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고 민주주의와 효율의 거시적 균형을 회복하는 길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아버지 박정희의 가치를 완성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당선인의 성공 여부는 과거 박근혜와 미래 박근혜의 승부에 달려 있다. 박근혜는 박근혜의 운명이다.



이 하 경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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