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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반 년 새 1만6천 호서 320만 호로

중앙선데이 2013.02.10 00:01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시동을 건 것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였다. 미나미는 중일전쟁 직후 식민지 한국을 병영(兵營)으로 만들었다. 그 뒤를 따라 일본 본토의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국민총동원법을 만들어 전 국민을 군부의 노예로 만들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⑥ 병영으로 변한 한·일

1935년 5월 이회영의 아들 이규호(李圭虎:이규창)는 엄순봉(嚴舜奉:엄형순, 일제에 사형당함)과 함께 상해의 친일파인 조선거류민회 부회장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다가 국내로 끌려와 종로서 고등계 사이가(齊賀)에게 취조를 당했다.



“나를 보고 ‘국어(國語)’할 줄 아느냐고 묻기에 안다고 하니 해보라고 하기에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우리나라 국어가 아니고 또 따로 무슨 국어가 있느냐고 반문하니 사이가가 발끈 화를 내면서 ‘바가야로’를 연발하며 피우던 담배를 수갑 찬 내 손등에 지졌는데 내 손등이 담뱃불로 지글지글 타서 참으로 참기가 어려웠다…사이가는 ‘너는 골수에 박힌 민족의식을 가진 놈이구나’…(『운명의 여진』).”



한국어 말살정책을 펴기 전인 1935년부터 벌써 한국어를 말하면 ‘골수에 박힌 민족의식을 가진 놈’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황도파(皇道派) 파시스트였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패전 후 A급 전범)가 식민지 한국을 병영(兵營)으로 만드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조선군사령관(1929)을 역임했던 육군대장 미나미는 1936년 8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종신형)로 교체되는 1942년 5월까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관동군 때 만났던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를 총독부로 데려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대리로 임명한다. 총독부 직제상 국장은 칙임관(勅任官:고등관 2등~1등) 이상만 부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편법으로 ‘대리’를 붙인 것이었다.



황민화 위해 1촌 1신사 운동도 보급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의 입구(사진 위)와 조감도(아래). 개신교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일어나서 2000여 명이 검거 또는 구속됐으며 주기철 목사 등이 옥중에서 순교·순국했다.
도쿄제대 법대 출신의 시오바라는 1918~21년 일본 내의 민주화운동인 ‘대정(大正) 데모크라시’에 맞서 ‘흥국(興國)동지회’를 결성했던 극우 파시스트였다. 미나미는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모사꾼이 ‘반도의 히틀러’로 불렸던 시오바라였다. 미나미는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0월 2일 경성발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를 제정했다. 총독부 학무국 촉탁이었던 이각종(李覺鍾) 같은 친일파도 이 서사 작성에 관여했는데, 아동용과 성인용 두 종류가 있었다.



아동용의 주 내용은 ‘저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저희들은 합심하여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인고(忍苦) 단련(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는 것이었다. 모든 학교와 관공서는 물론 일반 가정에서도 매일 아침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면서 일왕이 있는 동쪽 일본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받았다. 또 한국의 모든 촌락에 한 개 이상의 신사(神社)를 세우겠다는 ‘1면(面:촌) 1신사(神社)’ 운동도 함께 추진되었다. 이런 황민화 정책에서 아주 중요했던 것이 종로서 고등계 사이가가 이규호에게 말했던 국어(國語), 즉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었다.



1937년부터 모든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한인들은 일본어만 상용해야 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은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고, 1943년 4월에 개정된 제4차 조선교육령에는 조선어 과목 자체를 삭제했다. 전국 각지에 국어(國語:일본어) 강습소가 개설되고, 국어교본(國語敎本)이 배포되었다.



관청에 진정서를 쓸 때 일본어로 쓰지 않으면 접수 자체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1938년 한국인 중 일본어 해득자가 12.38%에 불과했으나 1943년에는 22.15%로 증가했다. 그래도 22.15%는 황민화가 요원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각급 학교에서 한국어를 쓰다가 발각되면 벌금을 내거나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어린아이들은 기발한 놀이로 국어상용(國語常用)을 비꼬았다. 한국어와 발음이 같은 일본어를 찾아내는 놀이인데, 한 아이가 “고구마”라고 말하면 다른 아이가 “조선어를 사용했다”면서 선생님에게 이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나는 조선어 고구마가 아니라 일본어 고구마(小熊:새끼곰)를 말한 것”이라고 응수하는 식이었다.



한국의 병영화(兵營化)는 거꾸로 일본 본토로 파급되었다. 일본 본토의 병영화는 일본군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면서 강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중일전쟁 때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육군대신은 일왕 히로히토에게 ‘사변(事變)은 두 달이면 끝난다’고 상주했지만 자기도취에 불과했다. 일본 군부의 나팔수가 된 언론들은 연일 승전보를 전했지만 일본의 자본, 즉 돈은 본능적으로 일본 군부의 실력을 알아차렸다.



중일전쟁 발발 소식에 도쿄 주식시장의 주가는 폭락했다. 남경 함락 직후 잠시 반등했지만 1938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총리가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내자 다시 대폭락했다. 고노에의 성명은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일전쟁 장기화에 초조해진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가 스기야마 육군대신과 손잡고 만든 것이 1938년 4월의 ‘국민총동원법(國民總動員法)’이었다.



국민총동원법은 일본 국민들을 군부의 노예로 만드는 전 국토의 병영화 법령이었다. 국민총동원법은 제1조에서 ‘전시(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을 포함)에 국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범주가 모호한 포괄적 입법이란 점이다. 제4조는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의 필요가 있을 때 칙령으로 정하는 바에 의거해 제국 신민을 징용해서 총동원 업무에 종사시킬 수 있다’고 규정했다. ‘칙령으로 정하는 바’라는 모호한 용어로 인신과 재산을 징발할 수 있었다.



국민총동원법 공포에 일본 증시 대폭락



창씨개명 법안, 한국인의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겠다는 창씨개명 정책은 숱한 반발과 저항을 초래했다. [사진가 권태균]
국민총동원법이 공포되자 주가는 다시 대폭락했다. 그중에서 주식시장에 가장 민감했던 조항은 제11조였다. 이 조항은 두 가지 내용이었는데 하나는 기업의 자금 조달이나 이익 부분의 처분에 대해서도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융기관에 대해 강제로 대출이나 채무인수 등을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일본 경제를 자본(資本)의 논리가 아니라 군부(軍部)의 논리대로 통제하겠다는 법이었다.



조선을 먼저 병영화해서 일본 본토에 수출했던 미나미는 국민총동원법이 제정되자 더욱 조선을 옥죄었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는 메이지 헌법을 적용하지 않았음에도 국민총동원법 같은 악법은 식민지에도 동시에 적용했다. 미나미는 내친김에 창씨(創氏)개명까지 밀어붙였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제령(制令)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서 한국 고유의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일본식 성씨가 ‘씨(氏)+명(名)’의 구조라면 한국에선 ‘본관(本貫)+성(姓)+명(名)’ 구조였지만 본관을 표기하지는 않았다. 창씨개명의 논리는 복잡했지만 그 골자는 한 자로 되어 있는 성(姓)을 일본처럼 두 자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미나미는 ‘조선인의 뜨거운 여망’에 의한다고 주장했고 겉으로는 “씨(氏)는 호주(戶主)가 이를 정함”이라고 해서 자발적인 것처럼 호도했지만 사실은 강제 그 자체였다.



1940년 2월에 이를 시행하면서 동년 8월까지 ‘씨(氏)’를 결정해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면 ‘비국민(非國民)’ 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서 경찰 수장(手帳)에 기입해서 사찰하고, 징용 때 우선하거나 식량 배급에서 제외했다. 또한 자녀들의 각급 학교 진학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성(姓)을 갈겠다’는 게 최대의 욕이었던 한국에서 성을 바꾸는 것은 아무리 군사력에 의지한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시 첫 달인 1940년 2월 호적총수 428만2754호 중 0.36%인 1만5746호만 개명했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행정관서와 경찰 등의 공조직과 중일전쟁 1주년에 만들어진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같은 친일 사조직을 동원해 개명을 독려해서 8월까지 320만116호를 달성했다. 호적총수의 무려 79%였다.



창씨개명은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광수는 1940년 2월 20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쓴 ‘창씨와 나’라는 글에서 ‘향산광랑(香山光浪:가야마 미쓰로)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臣民)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라면서 성은 물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토 지코(伊東致昊)로 성만 바꾸었고, 김활란(金活蘭)은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이라는 종교적 색채의 성씨로 바꿨다.



고육책도 잇따랐다. 전(田)씨나 전(全)씨 등은 조선왕조의 탄압을 피해서 성에 왕(王)자의 흔적을 남긴 고려 왕씨의 후예들이 많았는데, 전규헌(全圭憲)은 고려에서 고(高)자를 따고 고려 수도 송도(松都)에서 송(松)자를 따서 후루마쓰(古松)라고 개명했고, 백낙준(白樂濬)도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으로 백(白)씨의 흔적은 남겼다. 가네다(金田), 가네무라(金村) 등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요시야마(佳山)라고 최(崔)씨를 파자(破字)한 경우도 있었다.



전남 곡성의 유건영(柳健永)은 “슬프다, 유건영은 천년고족(千年古族)이다…나라가 멸망했을 때 죽지도 못하고 30년간 치욕을 받아왔지만…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 전북 고창의 설진영(薛鎭永)은 아이의 교사가 진급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해 아이가 울며 보채자 창씨개명 뒤 다음날에 자결했다. 성을 바꾸었으니 견자(犬子:개새끼)라고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멸종시키려 했다면 히로히토와 미나미는 한민족을 일본민족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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